들국화


                             도종환


너 없이 어찌
이 쓸쓸한 시절을 견딜 수 있으랴
 

너 없이 어찌
이 먼 산길이 가을일 수 있으랴


이렇게 늦게 내게 와
이렇게 오래 꽃으로 있는 너


너 없이 어찌
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 향기 있으랴
..................................................................

행복은 분명 과거의 어디엔가에 있다.
행복은 분명 미래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이킬 수는 없어
이 순간의 소중함은 더 명백해진다.


이 순간의 행복에 최대한 집중하는 것
단 한 번뿐인 내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려니.

꿈꾸는 물


                      한광구


비 오시는 소리 들린다.
꿈이 마르는 나이라서 잠귀도 엷어진다.
아, 푸욱 잠들고 싶다.
한 사나흘 푸욱 젖어 살고 싶다.
..........................................................

주룩비를 맞고 산 길을 오른다.


이제는 많이 왔겠거니 싶었는데
한참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풍광이 발목을 묵직하게 잡는다.


축축히 젖은 배낭 잠깐 놓을 양이었는데
땅도 길도 모두 젖어
마땅히 내려 놓고 쉴 곳이 없다.


땀인지 빗물인지
자꾸만 눈두덩을 타고 흘러내려 눈을 가리고
비 맞은 옷과 배낭은 한없이 무겁다.


잠시의 휴식조차 변변히 찾을 길이 없으니
당장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어깨 위로 머리 위로 솔솔 피어오른다.


얼마나 왔는지 알 필요가 없다.
어차피 가야할 길이니...
비는 계속 내려도 상관없다.
앞 길에 마음을 더 기울이는 게 맞으니...


수건으로 흐른 땀 쓰윽 한 번 훔쳐내고
풀린 허리끈 다시 바짝 졸라 매고
그새 조금 가뿐해진 발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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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이형기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도 갈앉은
저녁 하늘에
눈먼 우화는 끝났다더라


한 색 보라도 칠을 하고
길 아닌 천리를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 너머 산 너머에 네가 오듯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

언젠가부터 떠들썩하던 매미 울음소리가 사라진 풀 숲에
한가한 귀뚜라미 소리가 나즈막히 들리고,

 

새벽부터 창문 두드리는 빗소리에

서둘러 잠이 깨고,


선잠을 채 털어내지 못한 맨 살에 닿는

서늘한 새벽공기에 소름이 돋는 걸 보니,


이제
가을이 오시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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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품에, 그대 눈물을


                                    이정록


내 가슴은 편지봉투 같아서
그대가 훅 불면 하얀 속이 다 보이지


방을 얻고 도배를 하고
주인에게 주소를 적어 와서
그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 거야
소꿉장난 같은 살림살이를 들이는 사이
우체부 아저씨가 우리를 부르면
봉숭아 씨처럼 달려나가는 거야


우리가, 같은 주소를 갖고 있구나
전자레인지 속 빵 봉지처럼
따뜻하게 부풀어오르는 우리의 사랑


내 가슴은 포도밭 종이 봉지야
그대 슬픔마저 알알이 여물 수 있지
그대 눈물의 향을 마시며 나는 바래어 가도 좋아
우표를 붙이지 않아도 그대 그늘에 다가갈 수 있는
내 사랑은 포도밭 종이 봉지야


그대의 온몸에, 내 기쁨을
주렁주렁 매달고 가을로 갈 거야
긴 장마를 건너 햇살 눈부신 가을이 될 거야
...............................................................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무리 올려다 봐도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푸르름
가을로 접어드는 길 모퉁이
어디 쯤에 잠시 머물다.


시간이 가는 것은
자연히 알게 되는 것
하지만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되는 것
일어서야 할 때,
용기 내어 뒤로 돌아 앉다.


눈을 감고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떠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고
한 발 내딛다.


드디어
감사함의 바탕 위에
믿음의 기둥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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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한용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읍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

말 한마디 허투루 흘릴까 우려할만큼

생각한다는 그 말

믿는다.

돌이켜 보면

어느 한 순간

감사하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두 손 모으고

눈을 감고

기도하려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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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人生)


                        서산대사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오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  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라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  삶과 죽음, 오고 감이 또한 그와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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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문정희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

만남도 순간이고
헤어짐도 순간이다.


그러니
아쉬울 것도 그리울 것도 없다.


잊혀짐도 순간이고
깨달음도 순간이다.


그러니
조바심 낼 것도 서두를 것도 없다.


잘 된 것이 없다하니
그럼 잘 안된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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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7080추억의통기타Live스페이스
글쓴이 : 공간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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