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 여자의 일생
여자의 일생
박철
울며 태어나 서로 사랑하고 사랑 받고
다시 사랑하고 사랑하다 쓰러지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면
내가 쓴 시는 사람의 시는 아닐 듯하다
그저 외로움이라는 유기물이 장맛비에 쓸려가며
골짜기에 그어댄
빗살무늬
비가 오는구나 이웃이 준 애호박을 핑계 삼아
노친(老親), 칼국수를 만드는 염천(炎天)이다
빨래를 주무르는 손
밀가루를 반죽하는 손
늙으신 어머니의 갈퀴손이 쓰다듬는
빨래에서 물때가 스스로 양보하며 빠져나가듯이
밀가루가 제 스스로 몸을 섞고 있었다
얼마나 위대한 관계인가
어머니의 탄금(彈琴)이 헐은 집안 살림을 춤추게 하고
빛바랜 벽지도 소쩍새 울음에 오수를 누린다
신문 내려놓고 비 맞은 애호박처럼 연한 조바심으로
굽은 등 뒤에서 바라보니
어머니는 한 편의 시를 썰고 있었다
식민에서,
난리 겪고,
피난 오고,
시집살이에,
새끼들 키우고,
시부모 공양하고
여자의 일생이 그러하다면
내가 쓴 시는 사람의 시는 아니다
제 그림자도 지우며 걸어가는
무기물이 부르는 한갓
바람소리
고향은 어디 황해도 앞바다 깊은 곳이었을 듯
멸치 몇 다녀간 시원한 국숫물 한 그릇 들이키고
사발 내려놓으니
여자는 입이 하얗게 벌어지며
새끼 하나 보고 웃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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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지인의 모친상 기별에
천리길을 한달음에 달려갔다.
먼저 고인께 먼 길 살펴 가시라고 절을 올리고,
상주에게 잘 보내드리라고 당부를 하고 돌아서는데
환갑이 다 된 이가
밤송이만하게 된 눈을 뛰룩거리더니
영정앞에 주저앉아 엄마엄마하며
아이처럼 또 훌쩍훌쩍 운다.
오늘따라 유난히
햇볕이 따갑고
눈도 시리고
코 끝이 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