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문정희
하룻밤을 산정호수에서 자기로 했다
고등학교 동창들 30년만에 만나
호변을 걷고 별도 바라보았다
시간이 할퀸 자국을 공평하게 나눠 가졌으니
화장으로 가릴 필요도 없이
모두들 기억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우리는 다시 수학여행 온 계집애들
잔잔하지만 미궁을 감춘 호수의 밤은 깊어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냥 깔깔거렸다
그 중에 어쩌다 실명을 한 친구 하나가
"이제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년"이라며
계속 유머를 터뜨렸지만
앞이 안 보이는 것은 그녀뿐이 아니었다
아니, 앞이 훤히 보여 허우적이며
딸과 사위 자랑을 조금 해보기도 했다
밤이 깊도록
허리가 휘도록 웃다가
몰래 눈물을 닦다가
친구들은 하나둘 잠이 들기 시작했다
내 아기들, 이 착한 계집애들아
벌써 할머니들아
나는 검은 출석부를 들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가벼이 또 30년이 흐른 후
이 산정호수에 와서 함께 잘 사람 손들어봐라
하루가 고단했는지 아무도 손을 드는 친구가 없었다
................................................................
그냥 친구니까 좋다.
딱히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도, 이유도 없다.
한 때의 시간을 공유했던 것으로
수 십년을 흘려보낸 후에도
그 시절 기억을 함께 비벼먹을 수 있고,
그저 친구였다는 이유 하나로
네 주름살이며, 네 허물도 그냥 봐줄 수 있다.
고단한 삶 속에 잠시나마
어디 한 켠 기댈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가?
갈 때 가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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