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


                                                        문신


해마다 4월이면 쌀 떨어진 집부터 살구꽃이 피었다.
살구꽃은 간지럽게 한 송이씩 차례대로 피는 것이 아니라 튀밥처럼, 겨우내 살구나무 몸통을  오르내리며

뜨겁게 제 몸을 달군 것들이 동시에 펑, 하고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검은 눈망울을 단 아이들이 맨발로 흙밭을 뒹구는 한낮에 피는 것이 아니었다.
살구꽃은 낮은 지붕의 처마 밑으로 어둠이 고이고 그 어둠이 꾸벅꾸벅 조는 한밤중에 손님처럼 가만히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벽이 오면 오갈 데 없는 별들의 따뜻한 거처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이 핀 아침이면 마을 여기저기에서 쌀독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바닥의 깊이를 아는 사람들은 서둘러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굴뚝의 깊이만큼 허기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살구꽃은 안쓰럽게 몇 개의 잎을 떨구어주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살구꽃이 함부로 제 몸을 털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살구꽃은 뜰에 나와 앉은 노인들처럼 하루 종일 햇살로 아랫배를 채우며 시간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제 몸의 모든 기운을 한곳으로 모아 열매를 맺고 난 뒤,

열매가 단단히 가지 끝에 매달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타깝게 지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살구나무 아래에서 흙장난을 하며 놀던 아이들의 얼굴 위로 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풋살구를 털 때까지 얼굴 가득 버짐 같은 살구꽃을 달고 잠이 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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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중반에 접어들면서 계절이 정점에 온 느낌입니다.
화려 뻑적지근하게 펼쳐진 꽃잔치도 그렇고, 포근하다 못해 무더워진 날씨도 그러합니다.


예전같으면 순서있게 차례차례 피었던 꽃들도
매화,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부터 벚꽃, 목련, 라일락까지 한꺼번에 앞다투어 핍니다.
봄이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곧 멀리 지나가버려 아스라히 멀어져버리겠지요...


가만히 문신 님의 '살구꽃'을 읽다 보면
지난 시절의 고달픔과 아픔에 가슴이 시릿해집니다.
그때의 시골 풍경이 눈 앞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릅니다.

   4월

 

                         오세영

 

언제 우뢰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은 거기 있어라.
젊은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월.
눈 뜨면 문득
너는 한 송이 목련인 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른 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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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시인, 자연의 시인 오세영님의 시입니다.

4월이 격정적인 것은, 열광적인 이유는 아마도

사방천지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들의 향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잔치는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시들어 지고, 흩어져 뿌려지는 꽃의 주검들...

그 화려하면서도 쓸쓸한 이별...

하지만 4월이 공허하지만은 않은 이유는

푸르러, 짙푸르러 우거져 숲을 이루는 綠蔭의

푸른 생명의 생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잎이 피고, 줄기가 굵어지며, 뿌리가 깊어져,

나무가 숲을 이루고 산을 이루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4월이 격정적인 것은, 열광적인 이유는

아마도 이제 곧 시작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꽃소식

 

                                  도종환

 

날이 풀리면 한번 내려오겠다곤 했지만
햇살 좋은 날 오후 느닷없이 나타나는 바람에
물 묻은 손 바지춤에 문지르며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하듯
나 화사하게 웃으며 나타난 살구꽃 앞에 섰네

 
헝클어진 머리 빗지도 않았는데
흙 묻고 먼지 묻은 손 털지도 않았는데
해맑은 얼굴로 소리 없이 웃으며
기다리던 그이 문 앞에 와 서 있듯
백목련 배시시 피어 내 앞에 서 있네

 
몇 달째 소식 없어 보고 싶던 제자들
한꺼번에 몰려와 재잘대는 날
내 더 철없이 들떠서 떠들어쌓는 날
그날 그 들뜬 목소리들처럼
언덕 아래 개나리꽃 왁자하게 피었네

 
나는 아직 아무 준비도 못 했는데
어어 이 일을 어쩌나
이렇게 갑자기 몰려오면 어쩌나
개나리꽃 목련꽃 살구꽃
이렇게 몰려오면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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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에서의 꽃소식에 마음이 서둡니다.
바알갛고, 하얗고, 노랗게 펼쳐질 꽃잔치를 준비하려면
손도 씻고,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해야하는데
눈도 씻고, 마음도 닦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이렇게 몰려오면 어쩌나?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끊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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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기도 늦은 시간

오늘따라 술 기운이 얼큰하게 오른다.


세상에는 둘도 없는 친구와 함께 어깨를 곁고
유행가도 부르고, 군가도 부르고
흔들거리며, 비틀거리며, 위태롭게 세상 가운데를 가로질러 걷는다.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피해

다시 포장마차에 앉았다.
딱 한 잔만 더 마시기로 했다.


우리 상태를 한 눈에 파악하는 노련한 아주머니
참이슬 한 병 대신
따끈한 국물에 국수 한사발을 들이민다.


이유없는 눈물과 외로움까지 섞어

한사발 후루룩 마셔버리곤
계산도 뒤로 하고 다시 어깨동무를 한다.


조금 전보다는 덜 위태롭고
방금 전보다는 가벼워진 발걸음


우리 낳았을때도 국수를 먹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유리창과 마음


                              김기림

 

여보 -
내마음은 유린가봐. 겨울 하늘처럼
이처럼 작은 한숨에도 흐려버리니......


만지면 무쇠같이 굳은체 하더니
하로밤 찬서리에도 금이 갔구료.


눈포래 부는 날은 소리치고 우오
밤이 물어간뒤면 온 뺨에 눈물이 어리오.


타지 못하는 정열. 박쥐들의 등대.
밤마다 날어가는 별들이 부러워 쳐다보며 밝히오.


여보-
내마음은 유린가봐.
달빛에도 이렇게 부서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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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인, 너무나 감각적인 시어(詩語),
예민하면서도 손에 잡힐 듯 생동감 넘치는 상징과 비유.

행간을 읽어내려갈 때마다 쨍하고 금이 갈 듯하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작가로 이효석, 조용만 등과 함께
구인회를 창설했으며,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이기도 했던
김기림의 시 두 편이다.

나 당신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한용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합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
그만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하는 증거요
뛰다가 가로등에 기대어 울면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잠시라도 같이 있음을 기뻐하고
애처롭기까지 만한 사랑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않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나 당신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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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라도 같이 있음을 기뻐하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사랑하는 만큼 웃고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사랑을 무엇이라 말 할 수 있을까요?
정말 이렇게 사랑만 할 수 있을까요?

나의 사랑도 그랬던가요?

 

절로 사랑하고 싶어지는 시 입니다...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異國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짬','라이너 마리

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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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꾸만 윤동주 시가 눈에 걸린다.
가을이 배경이라 가을 어느 한 녘에 어울릴 것 같은데,
봄이 올 것만 같은(?)
이런 안개 자욱한 아침에도 잘 어울린다 싶다.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윤후명


이제야 너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너무 늦었다
그렇다고 울지는 않는다
이미 잊힌 사람도 있는데
울지는 못한다
지상의 내 발걸음
어둡고 아직 눅은 땅 밟아가듯이
늦은 마음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모두 떠나고 난 뒤면
등불마저 사위며
내 울음 대신할 것을
이제야 너의 마음에 전했다
너무 늦었다 캄캄한 산 고갯길에서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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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그 무엇도 영원할 수 없겠지.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 있고 싶어할 것을,
영원히 같이 있고 싶어할 것을 믿어야 겠지.
아마도 그래야겠지.
떠난다 해도, 잊혀진다 해도, 그것만은 믿어야겠지.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했음을...
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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