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서정윤


사랑하는 이여
나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어 주오


여기 들꽃처럼 피어
긴 세월의 한 점을 지나간,
사랑으로 살다가 흙으로 사라진
고단한 영혼이 잠들어 있네
사랑은 기쁨의 순간보다
고통의 나날이 더 많은 것을
하지만 짧은 환희가
머나먼 날들의 힘겨움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고


자신의 가슴에 있는 작은 것의 소중함을
너무 늦게 깨달아
영원히 꿈틀대며 기어다닐 것 같았던
배추흰나비 애벌레처럼
미래의 준비된 계획을 알지 못해 허둥대다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에 놀라
파도처럼 뒷 물결에 떠밀리어
바위에 가서 깨져 버린 상처 많은 시인이었다고


사랑하는 이여
내 삶의 많은 부분이 그대 위해 있고
내 생각의 큰 부분이 그대 향해 있네
순간순간 내 마음의 진실을 말하지만
그것이 진리가 되지는 못하였기에
나는 꽃이 진 들풀이 되어
거친 새들로부터 씨앗들을 지키고 있네
그대를 구름의 높이로 올리네
....................................................

이제와 내 생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참 보잘 것이 없다.
그래도 이리 적어주면 좋겠다.


한 세상 잘 놀다 간 사내가
이 생에서는 좀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있어
다음 생에는 더 잘 살아 보겠노라 다짐하고 가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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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遠視)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

언젠가 수를 셀 때, 앞에서부터 세는 것이 빠른지 아니면 뒤에서부터 세는 것이 나은지를 고민하게 됐다.
언젠가 이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할지 헤어지는 것이 나은지를 고민하게 됐다.
언젠가 나와 이별하는 사람이 새롭게 만나는 사람보다 많아졌다는 걸 고민하게 됐다.
언젠가 내게 남은 날이 또 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을 고민하게 됐다.


언젠가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다.
언젠가 내가 남기고 갈 것도, 가지고 갈 것도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다.
지금의 내 발걸음을 가볍게 하려면 많이 내려놓고, 비우고, 덜고 가는 게 맞다는 걸 알았다.


함께 가자고 마주 잡은 손을 언젠가는 놓아야 한다. 살다 보면 각자의 길을 갈 때가 온다.
부모, 자식, 형제, 자매, 친구, 선후배, 동료, 연인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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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이형기
 

나무는
실로 운명처럼
조용하고 슬픈 자세를 가졌다.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그 아랫마을에 등불이 켜이듯
 

그런 자세로
평생을 산다.
 

철따라 바람이 불고가는
소란한 마을길 위에
스스로 펴는
그 폭넓은 그늘......


나무는
제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
천 년의 강물이다.
...........................................................................................

고비사막 한 가운데서 죽을 고비를 넘고
살아 돌아온 한 젊은 친구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도 죽는 것 보다는 낫다는 걸 알았단다.


저걸 알만큼 고통스러웠구나 싶어
가슴 아프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살다 보면 종종 고통스러운 통과의례를 거쳐야
겨우 한꺼풀 벗고 새로운 한 살이를 얻곤 한다.
하지만 그 한 살이도
늘 준비하고 구별하고 기도하고 실행하는 사람의 몫이다.


삶은 결국 기꺼이 견디는 것이고
당연히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마땅히
살고 싶어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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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김현승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生命)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들이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우리 삶에서
기도로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다면
하루 종일 오직 기도만 하고 살면 될 것이다.


우리 삶에서 필요한 것을
기도로 모두 구해야 한다면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살아도 터무니없이 모자랄 것이다.


살기 위해 끝없이 구하지 않아도 편안히 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살아있음으로 내 뜻대로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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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하여


                                   오탁번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갈아주면서
따뜻한 손으로 내 팔뚝을 만지자
바지 속에서 문득 일어서는 뿌리!
나는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다


다시 태어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말끔히 하고
환자복 바지를 새로 달라고 했다
- 바다 하나 주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했다
- 바다 하나요
바지바지 말해도 바다바다가 되었다
........................................................................

참 어른이 된다는 것
참 어려운 일이다.


어느 때가 되면,
하나 하나 내려놓고
많은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무엇이든 다 잘 할 수 없음을, 잘 볼 수 없음을
구별하기 쉽지 않고, 분명하게 알 수 없음을...


물론 제일 먼저 말을 줄여야 한다.
자칫 헛소리 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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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베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녯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 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루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

*김치가재미:북쪽 지역의 김치를 넣어 두는 창고, 헛간
*양지귀 : 햇살 바른 가장자리
*은댕기 : 가장자리
*예대가리밭 :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산멍에 : 이무기의 평안도 말
*큰 마니 : 할머니의 평안도 말
*집등색이 : 짚등석, 짚이나 칡덩굴로 만든 자리
*자채기 : 재채기
*희수무레하고 : 희끄무레하고
*삿방 : 삿(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을 깐 방
*아르궅 : 아랫목
*고담(枯淡):(글, 그림, 인품 따위가) 속되지 아니하고 아취가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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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마음


                                 김민부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 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 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봉덕사에 종 울리면 날 불러 주오
저 바다에 바람 불면 날 불러 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파도 소리 물새 소리에 눈물 흘렸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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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나태주


난초 화분의 휘어진
이파리 하나가
허공에 몸을 기댄다


허공도 따라서 휘어지면서
난초 이파리를 살그머니
보듬어 안는다


그들 사이에 사람인 내가 모르는
잔잔한 기쁨의
강물이 흐른다
..............................................................

두 사람이 기대선 모습이 '사람 인(人)' 이라고 한다.


서로 기대설 수 있음은 아마도 믿음일 것이다.
서로 기대설 수 있음은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서로 기대설 수 있음은 아마도 감사일 것이다.


사람 사이(人間)는
믿음이고, 사랑이고, 감사일 것이다.


사람이라서 기쁘냐고 물으면
지체없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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