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드는 날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 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


대통령의 최순실관련 대국민담화에서

대국민사과와 검찰수사 혹은 특검까지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음에도

좀처럼 국민들의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는 모습이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하려고 했는가를 생각해보면 자괴감마저 든다고 울먹이며
담화내용을 적은 종이를 띄엄띄엄 읽어 내려간다.
그 모습만 봐도 달라질 게 별로 없어보인다.


사과는 제때에 구체적으로 진정성을 담아야하는데 오늘의 대국민사과는 그렇지 못했다.
이번 사태의 관련자들의 범죄사실이 있다면 명백히 밝혀 처벌을 하면 된다지만,
현정권을 믿었던 국민들의 실망감과 배신감은 어찌할까?


그깟 권력이 뭐라고 내려놓지 못하고 감추고 속이려고만 하는지...
안타까울뿐이다.
이 좋은 가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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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꽃


               유안진


지난 여름 동안
내 청춘이 마련한
한줄기의 강물


이별의 강언덕에는
하 그리도
흔들어 쌓는



그대의 흰 손
갈대꽃은 피었어라.
.............................


가을이
갈대를 흔드는
바람결처럼
잠시
스쳐가려나 보다


어쩌면
사람의 연(緣)도
그렇게
잠시
스쳐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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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장 (罷場)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문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켤레 또는 조기 한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하산 길


'얼마나 가야 해요?'
혼잣말하듯 맥없이 던지는 한 마디 말을 주워


'금방이에요'
하고 받았다


하얀 거짓말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입가에 하얀 웃음이 번진다.


너도 그리고 나도
굽이굽이 돌아
여기까지 왔음을 알기에


조금 가벼워진 걸음을
다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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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게 묻다


                        고두현


천왕성에선
평생 낮과 밤을
한 번밖에 못 본다.
마흔두 해 동안 빛이 계속되고
마흔두 해 동안은 또
어둠이 계속된다.
그곳에선 하루가 일생이다.


남해 금산 보리암
절벽에 빗금 치며 꽂히는 별빛
좌선대 등뼈 끝으로
새까만 숯막 타고 또 타서
생애 단 한 번 피고 지는
대꽃 틔울 때까지


너를 기다리며
그립다 그립다


밤새 쓴 편지를 부치고
돌아오는 아침
우체국에서 여기까지
길은 얼마나
먼가.
.....................................................................

지구와 가장 가깝고, 물이 있을 수 있고,
지구와 크기도 중력도 비슷한 행성을 발견했단다
프록시마 b, 거리는 겨우 4.25광년


언뜻 가까운 듯 보이지만 굳이 계산을 해 보자면,
음속의 30배에 달하는 제2우주속도(11.2km/sec)로 날아도 11만 4천년
마하 2 의 초음속 제트기 속도로 날면 160만년 남짓


어차피 그 거리를 11만년에 주파하는 건 현재로선 불가능하니
초음속 제트기로 호모에렉투스를 태워 출발하면
현대인이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리다.

160만년...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우리 지구를 꼭 지켜야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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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신경림  
 


생전에 아름다운 꽃을 많이도 피운 나무가 있다.
해마다 가지가 휠 만큼 탐스런 열매를 맺은 나무도 있고,
평생 번들거리는 잎새들로 몸단장만 한 나무도 있다.
가시로 서슬을 세워 끝내 아무한테도 곁을 주지 않은 나무도 있지만,
모두들 산비알에 똑같이 서서
햇살과 바람에 하얗게 바래가고 있다.
지나간 모든 날들을 스스로 장미빛 노을로 덧칠하면서.
제각기 무슨 흔적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다하면서.
...........................................................................................................


바람 한 점, 비 한방울 없어 보이는 푸른 하늘엔 햇볕 가릴 구름조차 드물다.
무엇이든 다 태워버릴 기세로 따갑도록 내리쬐는 여름 한낮 볕에
큰 화분이 넘치도록 자란 과꽃이며 백일홍 꽃이 하얗게 타버렸다.


맥 없이 축축 처진 화초들이 안스러워 서둘러 물을 대주려니
언제 맺힌지도 모를 땀방울이 먼저 짧은 구랫나루 타고 뚝뚝 떨어지고
금세 소낙비라도 맞은양 등판이 전부 흥건히 젖었다.


오늘은 가지마다 잔뜩 매달린 붉은 만냥금 열매를 다 따주고 시든 잎이며 가지도 다 정리해줘야겠다.
먹지도 못할 농익은 열매들 매달고 있기도 만만치 않을 테고,
메마른 잎이며 마른 가지도 어지간히 귀찮을 테고,
늦 봄에 꽃 떨어져 이제 갓 맺힌 어린 초록 열매들도 잘 키워야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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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집에


                      김광규


복실이가 뒷다리로 일어서서
창틀에 앞발 올려놓고
방 안을 들여다본다
집 안이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나 보다
오후 늦게 마신 커피 덕분에
밀린 글쓰기에 한동안 골몰하다가
무슨 기척이 있어
밖으로 눈을 돌리니
밤하늘에 높이 떠오른
보름달이 창 안을 들여다본다
모두들 떠나가고
나 홀로 집에 남았지만
혼자는 아닌 셈이다
...................................................................

늘 반쪽만 커튼이 드리워진 내 창으로
용케 비친 반달
쌀랑한 기운이 코끝에 살짝 묻어온다
무심코 창을 열어젖히기엔 아직
내 잠도 내 마음도 달갑지않다.


이른 새벽, 뒤척이다 우연히 마주친
반쪽 남은 달이 반쯤만 잠을 깨웠다.


머리맡 어딘가에 던져둔 담뱃갑
마음 한구석에 늘 웅크리고 앉은
유혹의 싹을 손을 뻗어 더듬거려 찾는다.
지금부터 반쯤만 그 유혹을 태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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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이외수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을
한 겹씩 파내려가면
먼 중생대 어디쯤
화석으로 남아있는
내 전생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때도 나는
한 줌의 고사리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무는 바다 쪽으로 흔들리면서
눈물보다 투명한 서정시를
꿈꾸고 있었을까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
멀리 있어 그리운 이름일수록
더욱 선명한 화석이 된다
...........................................................


작은 돌멩이 하나 손가락으로 툭툭 튕겨
땅위에 짙게 금을 그어가며
광활한 대지의 지배자를 꿈꾸던...


먼 하늘을 향해 끝없이 날아오르던 연이

실이 끊겨 언덕 너머 저편 하늘로 사라져가던 모습을 멍하니 서서 지켜보며
언젠가는 저 먼 곳으로 꼭 내 연을 찾으러 가리라 다짐하던...


반으로 쪼개져버린 팽이를 붙여보겠다고 촛농을 떨어뜨리며
닭똥같은 눈물도 뚝뚝 섞어 떨구던 ...


순수함만으로도 행복하던 그때가
문득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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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학교


                          문정희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 푸른 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놓을 때
사랑한다! 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 하며 숲을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


뜨겁지도 맵지도 않은 아침 햇살이 천지에 번지고
햇발아래 푸르름은 끝없이 짙어만가고
생명의 해답일지도 모르는 초록 사이사이에서
각양각색의 꽃폭죽이 사방에서 연이어 펑펑 터진다.


한들한들 꽃을 흔드는 꿈결같은 바람을
온몸으로 감각하며
심장이 콩쾅콩쾅 뛴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자연이 그리고 생명이 주는 설렘은
조화롭고 완벽하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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