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물 드는 5월에


                                   안도현

                                        
그 어디서 얼마만큼 참았다가 이제서야 저리 콸콸 오는가
마른 목에 칠성사이다 붓듯 오는가


저기 물길 좀 봐라
논으로 물이 들어가네
물의 새끼, 물의 손자들을 올망졸망 거느리고
해방군같이 거침없이
총칼도 깃발도 없이 저 논을 다 점령하네
논은 엎드려 물을 받네


물을 받는, 저 논의 기쁨은 애써 영광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
출렁이며 까불지 않는 것
태연히 엎드려 제 등허리를 쓰다듬어주는 물의 손길을 서늘히 느끼는 것


부안 가는 직행버스 안에서 나도 좋아라
金萬傾 너른 들에 물이 든다고
누구한테 말해주어야 하나, 논이 물을 먹었다고
논물은 하늘한테도 구름한테도 물을 먹여주네
논둑한테도 경운기한테도 물을 먹여주네
방금 경운기 시동을 끄고 내린 그림자한테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구한테 연락을 해야 하나
저것 좀 보라고, 나는 몰라라


논물 드는 5월에
내 몸이 저 물 위에 뜨니, 나 또한 물방개 아닌가
소금쟁이 아닌가

..........................................................................................

 

얼마전 아마존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우기가 시작되면서 아마존 습지에 물이 드는 모습을 생생하게 찍은
화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는데요...


이 시도 어지간히 들썩들썩 들썩거리면서
생명의 소중함과 경이로움,
활력 넘치는 생명의 에너지를 이야기 해 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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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김종철


꽃이 지고 있습니다
한 스무 해쯤 꽃 진 자리에
그냥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일 마음 같진 않지만
깨달음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축복 받은 일인가 알게 되었습니다
한순간 깨침에 꽃 피었다
가진 것 다 잃어버린
저기 저, 발가숭이 봄!
쯧쯧
혀끝에서 먼저 낙화합니다.
.................................................................

꽃 진다고 무어라 무어라 떠들었더니
이 시가 눈에 확 들어온다.


날씨가 무척 추웠던 어느날, 집안에 들어서며
'날씨 더럽게 춥네...' 했다가

'날씨가 더럽냐?... 네 입이 더 더럽다...' 고
어르신에게 혼줄이 났다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래 봄 날이 언제 갔던가?
우리가 의미없이 보내버린 것이 아닌지...


꽃들에게 축복받은 것을 감사할 줄은 모르고
너덜너덜한 입으로
함부로 꽃진다고 투덜거린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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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에는


                      김경미


가슴마다 맺힌 산맥들 길을 주고
봄에는 푸른 땅으로 나서자
산과 들마다 걸려 넘어진 사랑 일으켜 안아
이 땅 끝까지 가랑비로 얼굴 맞대보자


봄엔 어딘들 못 나서랴
봄엔 뉜들 얼굴 맞대지 못하랴

..................................................

비가 온다.
분명 봄비다.


지난 주말, 눈처럼 벗꽃 잎 흩날리더니
어느새 가지마다 파릇파릇 새싹 가득하다.


흐드러지게 핀 꽃잔치 구경도 못했는데,
이젠 한풀 꺾인 꽃마당
흩어진 꽃잎 쓸어담기에 더 바빠졌다.


이제야 겨우 한숨 돌리려나 보다.


오늘은 비가 온다.
분명 봄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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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날


                       신경림


새벽 안개에 떠밀려 봄바람에 취해서
갈 곳도 없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불현듯 내리니 이곳은 소읍, 짙은 복사꽃 내음.
언제 한 번 살았던 곳일까,
눈에 익은 골목, 소음들도 낯설지 않고.
무엇이었을까,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이.
낯익은 얼굴들은 내가 불러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복사꽃 내음 짙은 이곳은 소읍,
먼 나라에서 온 외톨이가 되어
거리를 휘청대다가
봄 햇살에 취해서 새싹 향기에 들떠서
다시 버스에 올라. 잊어버리고,
내가 무엇을 찾아 헤맸는가를.
쥐어보면 빈 손, 잊어버리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서 내릴지도.
........................................................................

제발 봄바람 났으면 좋겠더라.

올 봄에도 봄 꽃 구경도 변변히 못하고
세월만 그저 보냈다.


이제 봄 비 궂게 내릴테고

심술맞은 봄바람마저 닥치면
꽃잎은 다 떨어지고,
내 맘도 어디론가 흩어져
갈팡질팡 하다가
아른아른 멀어지고...

어른어른 늙어지고...

사는 이유


                        최영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 웃음이
생각나면 구길수 있는 종이가
창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 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

오랜만에 집까지 찾아온 친구,
마주 앉아 한 잔 한다.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할 사람들과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을 펼쳐놓고
쫓기는 일상과 팍팍한 인생 이야기를 안주 삼아
한 잔 또 한 잔 주거니 받거니 했다.


어느새 목전까지 오른 취기와 몰려드는 피로를

못 이기고
스르르 기울어지는 녀석의 머리를 받아 자리에

바로 눕힌다.
바닥에 닿기가 무섭게 코를 곤다.


그래, 친구야.
사느라 고생이 참 많다.


다시 혼자 남은 술자리,
술잔이 자꾸 흐려진다.

님은 먼 곳에


                       이대흠


미칠 것 같은 날 꽃 피어
이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봄날
세상의 가시들이 다 내게로 향하는 것 같은
이 황홀함
내 안의 가지들엔 물 오르지 않고
나는 내 삶을 너무 둥글게 만들었네
오래된 노래들이 거리를 흘러
나는 되도록 먼 길을 돌아서
그대에게 가네 그대는 없고 나무들
저 검은 몸 속에 어떻게
저리 희고 푸른 색들을
숨겨 두었을까
봄날은 깊어 그대 멀리 있는 나는
알겠네 지난 날 그대의
껍질만 보아온 것을
...................................................................

진작에 이 향그런 흙내음을,
진한 봄 꽃 향기를 마음껏 맡아보았더라면,
제겨 딛고 거두기도 힘들게 지친 발걸음 옮겨 옮겨
그 먼 길을 비틀거리고 헤메지 않았을 것이다.


진작에 저토록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었으면,
화려한 꽃 잔치에
넉넉한 마음자락 휘날리며
한바탕 춤이라도 어울리게 추어보았을 것이다.


내 속에 아무도 없었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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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I am Dead, My Dearest (사랑하는 이여, 내가 죽거든)


                                  Christina Georgina Rossetti (1830-1894)

 
When I am dead, my dearest,
Sing no sad songs for me;
Plant thou no roses at my head,
Nor shady cypress tree:                
Be the green grass above me
With showers and dewdrops wet;


And if thou wilt, remember,
And if thou wilt, forget.


I shall not see the shadows,
I shall not feel the rain;
I shall not hear the nightingale
Sing on, as if in pain:
And dreaming through the twilight
That doth not rise nor set,              


Haply I may remember,
And haply may forget.

 

사랑하는 이여, 내가 죽거든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마세요.
장미꽃도, 그늘 드리우는 사이프러스 나무도
제 무덤 머리 맡엔 심지 말고,
비와 이슬 흠뻑 머금은 푸른 잔디만
제 무덤 위에 자라게 해주세요.


그리고 마음이 내키신다면 절 기억해주세요
잊어버리신다해도 할 수 없지요.

 
나무 그늘도 보지 못하고
비도 느끼지 못할 거예요.
슬픔에 젖은, 나이팅게일 새의 노래도 듣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모른 채,
황혼을 지나 꿈속에서...


어느날 우연히 당신을 기억해 낼지도
그냥 잊어버릴 지도 모르죠.

.......................................................................................
또 한사람과 갑작스레 이별해야 했다.
하나뿐인 자식 앞세워 먼저 보내야하는 노인의 통곡소리는

곧 숨을 멈출 듯 아슬아슬하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더듬고 있었다.
작은 단지에 반도 못 채운 생,
허연 분가루통을 안고 화장장을 나서는 길엔
그 보다 더 할 것도 없고

덜 하지도 않은 애통한 이별이
줄을 이었다.


기억하거나

잊어버리거나
아무런 상관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길을
가만 가만 돌아 내려온다.


크게 소리내어 웃거나 떠들지 않는 것,
약간의 눈물을 보태는 것,
다시 뒤돌아보지 않는 것,
마지막으로 잘 가라고 기도해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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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招魂)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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