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다
 
                      이병률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
울진에 도착하니 밥냄새와 나란히 해가 뜨고
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
해변 식당에서 아침밥을 시켜 먹으며
찌개냄비에서 생선뼈를 건져내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치솟는 것은 무슨 설움 때문일까
탕이 매워서 그래요? 식당 주인이 묻지만
눈가에 휴지를 대고 후룩후룩 국물을 떠먹다
대답 대신 소주 한 병을 시킨 건 다 설움이 매워서다
바닷가 여관에서 몇 시간을 자고
얼굴에 내려앉는 붉은 기운에 창을 여니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 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내 눈알은 저만한 솜씨도 못 되어서 늘 찔끔하고 마는데
그가 올라앉은 뱃전을 적시던 물기가
내가 올라와 있는 이층 방까지 스며들고 있다
한 몇 달쯤 흠뻑 앉아 있지 않고
자전거를 끌고 돌아가는 사내의 집채만한 그림자가
찬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고 있다
.....................................................................................................

손가락 마디 마다 동전 파스를 붙인 꼴이 말이
아니다 얼마나 썼다고 남들이 보면 세상 험한
일은 이 손으로 다 해댄 줄 알겠다 싶다 손가락
마디도 매끈하고 생김도 희고 길죽하게 빠진 걸 보니
찬물에 손 한 번 안 담그고 살았겠다 싶은데 손 마디 마다
붙여놓은 동전 파스로 모냥 제대로 빠진다 덕지덕지 붙이고 나서
통증이라도 덜어 볼 양인데 붙이면서도
영 미심쩍다 이 동전만한 게 뭐 대단한 효능을 발휘할까 싶고 손마디에
얼마나 붙어있을까 싶고 이렇게까지 여러 개를 붙여야하나 싶은데 그러면서 자꾸만
동전 파스를 떼서 손등으로 손가락 마디로 옮겨 붙인다 버릇이나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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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딘 당신


                    권지영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모든 이야기가 당신이 됩니다.
차창 밖으로 달리는 자동차가 되었다가
마른 잉크의 속삭임이 담긴 우체통이 됩니다.
서서히 나타나는 별의 안부에 가벼워지는 나는
당신과의 기억 속을 날아가는 나비가 됩니다.
나의 안테나는 아스팔트에 눅눅한 전파를 보내고
느리게 가는 시계와 마주 앉아 벽이 됩니다.
하나, 둘 어스름 속에서 피어나는 불빛이 당신이 되고
탁자 위에 피어나는 커피 향이 됩니다.
다가오는 발자국이 당신이기를
카페 문에 달린 맘 급한 손잡이가 됩니다.
기다림의 시간만큼 더디게 머물러주기를
오래되고 낡은 의자가 됩니다.
.................................................................................................

바싹 마른 가지가 뚜욱 부러지며 남긴 공허한 소리,
그 소리가 맴돈 자리에 단단한 옹이가 박힙니다.
한동안 잊었던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립니다.

비바람이 머물다 간 잎새에 매달린 물방울,
그 습기가 두꺼운 나무 껍질 틈새로 스며 푸른 이끼가 자랍니다.
한살이 든든히 견딜 푸른 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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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윤수천


한 번 떠나온 고향은 가지 않아야 한다
가지 않아야 고향은 옛 모습 그대로 거기 있다
버들강아지 노래하는 시냇물
황소울음 퍼지는 언덕
아이들 줄달음치는 동구 밖 길


가지 않아야 친구들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 옛날 그 모습 그대로 거기 산다
..........................................................................................

동그란 얼굴에 키가 약간 작았던 아이
눈빛은 맑고 머리카락이 얇았던 아이
손가락이 길었고 피부가 하얗던 아이
단정한 옷차림에 목소리가 얘뻤던 아이
작은 아이

어둠이 짙게 내린 깜깜한 골목 어귀에 앉아
가녀린 두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작은 아이

어느새
많은 시간이 지났고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기쁨과 아픔이 함께 했고 여러 만남과 헤어짐.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작은 아이

네 노래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길
네 생각을 여러 사람들과 얘기하길
아주 먼 길을 떠날 때 누구도 아파하지 않기를
잘 놀다 왔느냐 물음에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주저없이 답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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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윤동주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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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들렸다


김승희


폭설의 밭 속에서 살고 있는 것들!
백설을 뻗치고 올라가는 푸른 청보리들!
폭설의 밭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들!
시퍼런 마늘과 꿈틀대는 양파들!
다른 색은 말고 그런 색들!
다른 말은 말고 그런 소리들!


하루를 살더라도 그렇게
사흘이나 나흘을 살더라도 그렇게!
..................................................................

심장이 둔탁하게 뛰기 시작하고
관자놀이에 핏줄이 살짝 서면서
입술이 바짝 마르면서
목줄기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찌르르르르
짜릿한 전기 신호


꿈틀대는
굳어지는
솟구치는


뭉큰한 것
순수한 것
푸른 것


그리고 날 것


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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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성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

풀과 바람


                     이재무


풀은 물처럼 한줄기 바람이
소리 없이 흘러오자
낮게 몸 눕혀 바람을 흐르게 하고
바람이 다 흐른 뒤에는
비에 젖은 가축이 물기를 털어 내듯
몸 흔들어 살갗에 묻은 바람을 털어 낸다
그 여린, 순환의 물결 사이로
먼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
수세기의 시간이 고이고 있다

................................................

팬티와 빤쓰


                     손현숙

 
외출을 할 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우선 빤쓰부터 벗어야 한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지만, 편안하지만,
그래서 빤쓰지만 땡땡이 물무늬 빤쓰
 
집구석용 푸르댕댕 빤쓰는 벗어버리고
레이스팬티로 갈아입어야 한다
앙증맞고 맛있는 꽃무늬팬티 두 다리에 살살 끼우면
약간 마음이 간지럽고 살이 나풀댄다
나는 다시 우아하고 예쁜 레이스공주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땡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쎄콤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유명 라펠라 팬티로 단단한 무장을 한다
 
오늘 바람이라도 살랑, 불라치면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나 죽어도 꽃무늬 레이스로 들키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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