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유


                        최영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 웃음이
생각나면 구길수 있는 종이가
창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 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

오랜만에 집까지 찾아온 친구,
마주 앉아 한 잔 한다.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할 사람들과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을 펼쳐놓고
쫓기는 일상과 팍팍한 인생 이야기를 안주 삼아
한 잔 또 한 잔 주거니 받거니 했다.


어느새 목전까지 오른 취기와 몰려드는 피로를

못 이기고
스르르 기울어지는 녀석의 머리를 받아 자리에

바로 눕힌다.
바닥에 닿기가 무섭게 코를 곤다.


그래, 친구야.
사느라 고생이 참 많다.


다시 혼자 남은 술자리,
술잔이 자꾸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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