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지문


                                  이은규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힌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여진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당신의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 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行方)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초라함이란,
우리가 겨우 알 수 있는 것의 부족함이란...


우리가 어디를 가든,
다시 어디서 만나든
서로 반갑고 따뜻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정록...서시  (0) 2009.02.12
김왕노...한강둔치   (0) 2009.02.12
김광균...설야(雪夜)   (0) 2009.01.29
신경림... 가난한 사랑의 노래 / 나목 (두 편)  (0) 2009.01.22
김사인... 지상의 방 한칸  (0) 2009.01.1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