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여관에 가 묵고 싶다


                                                    박완호


언젠가 너와 함께 들른 적 있는, 바람의 입술을 가진 사내와 붉은 꽃의 혀를 지닌 여자가 말 한 마디 없이도 서로의 속을 읽어 내던 그 방이 아직 있을지 몰라. 달빛이 문을 두드리는 창가에 앉아 너는 시집의 책장을 넘기리. 三月의 은행잎 같은 손으로 내 中心을 만지리. 그 곁에서 나는 너의 숨결 위에 달콤하게 바람의 음표를 얹으리. 거기서 두 영혼의 안팎을 넘나드는 언어의 향연을 펼치리. 네가 넘기는 책갈피 사이에서 작고 하얀 나비들이 날아오르면 그들의 날개에 시를 새겨 하늘로 날려보내리. 아침에 눈뜨면 그대 보이지 않아도 결코 서럽지 않으리.


소멸의 하루를 위하여, 천천히 신발의 끈을 매고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나의 전부를 남겨 두고 떠나온 그 방. 나 오늘 들꽃 여관에 가 다시 그 방에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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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주 가끔씩은 챗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어디로든 멀리 가고픈 욕망에 사로잡힌다.
공간적으로 '멀리'는 아니더라도, 일상을 탈출해서 어디론가를 향해서 떠나고 있음을 갈망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니, 공간을 벗어나지 못해 어디론가로 가고 있지 못하더라도 일상을 잠시 잊고 있는 시간이면 좋겠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간이 아릿한 추억과 맞닿아 살짝 찌릿해도 좋을 듯하다는 생각...


이 시가 그러하다.
감각적이고 함축적인 짧은 한 문장이 수많은 장면과 겹치면서 아련한 추억속의 감각을 살짝살짝 일깨우고, 야릇한 향기를 은근히 뿜어낸다.

글을 읽다보면 저 아래에서 묵직한 자극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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