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옛집에 가다


                     이상국

 
봄날 옛집에 갔지요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
머위 이파리만한 생을 펼쳐들고
제대하는 군인처럼 갔지요
어머니는 파 속 같은 그늘에서
아직 빨래를 개시며
야야 돈 아껴 쓰거라 하셨는데
나는 말벌처럼 윙윙거리며
술이 점점 맛있다고 했지요
반갑다고 온몸을 흔드는
나무들의 손을 잡고
젊어선 바빠 못 오고
이제는 너무 멀리 가서 못 온다니까
아무리 멀어도 자기는 봄만 되면 온다고
원추리 꽃이 소년처럼 웃었지요
...........................................................

이제 봄인가 했더니,
잠깐 꽃 잔치 훌쩍 지나고
금세 어린이 날도 지나고,
어버이 날도 지나고,
우리 아버지 제삿날도 지났다.


한밤중, 제사상 다 치우고
누나네, 동생네 다 보내고
혼자 거실에 남았다.


상에 올렸던 술을 병에 채우며,
아마 살아 계셨으면 좋았을 거라고
허공에 말을 건냈다.


봄 비가 오시는 지,
후두둑 후둑 후둑
티디딕 티딕 티딕
창 밖이 흐려진다.


금세 술 잔도 다 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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