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 어
최을원
소양호,
빙판 구멍에 긴 촉수 내리고 앉은 사람들
깊고 어두운 곳에서 올라온 기억이 눈부시게 파닥거린다
그 젊은 날, 소양호는 허공에 떠 있는 유리공이었다
유리공 너머에서, 계절이 휘어지고, 건조한 햇살도 휘어지고,
속이 훤히 비치는 풋사랑도 휘어졌었다
세상은 너무도 투명해서 공지천 똥물조차도
대학 노트만한 여인숙 방 하나 가릴 수 없었다
내 속에 심해어처럼 숨어 있던,
부끄러움이 부끄러움에게 건네던 말들이
지금, 내 손바닥 위에서 파닥이고 있다
알몸의 기억 초고추장에 찍으면,
몇 개의 거리들, 포구들, 주점들이 혀끝을 찌르며 지나간다
삭풍이 광활한 마당을 쓸고 있다
유배된 날들이 계곡으로 쓸려가고 있다
裸木들이 등뼈 완강한 산을 오르고,
소양호는 여전히 산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유리공은 없다
내장마저 서럽게 내비치던 날들은 이젠 없다
겨울새 한 마리 계곡마다 끝없이 기웃거려도
유리공 속에 갇혀 은빛 비늘 반짝이던 시간들
그곳으로 결코 회귀할 수 없음을, 나도,
오래 전 나를 떠나간 사랑도,
서로의 비린내를 나누어 갖고
이 도시의 어두운 터미널을 빠져나간 그 모든 연인들도
그때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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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의 고독과 아픔, 상실과 동정심이 고스란히 떠 있는 소양호,
그 곳에 가본지도 벌써 10여년이 훌쩍 넘었다.
그래, 지금 돌이켜보면 그 허무의 시간이 성찰의 틈을 주기도 했음을...
이제는 그런 여유도 갖지 못하고 있다.
세상 그 무엇도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음을,
지나간 시간은 그저 추억의 한 장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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