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일


                        신용선


헛딛지 않고도 돌아오는 길이 찾아지는
두 번째 이별처럼
자신이 무언가에 익숙해지고 있음을 깨닫는 일은
쓸쓸하다.


익숙해지는 것은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는 데
드는 시간이
나이를 먹을수록 짧아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쓸쓸하다.
언제나 그 골목의 끝에 서 있으므로 밤이 와도 다만
어둠을 밀어낼 뿐 빛나지 않는 가로등처럼
생기없는 것들, 더 많이 죽음의 편에 서 있는 것들이
익숙하게 자신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

우리가 가고 오는 길이 다르지 않아
오면, 만나게 되고
또 가면, 잊게 되는 것...


어디만큼 왔는지라도 알면
속이 편해질지,
아니면 갑갑해질지...


그래도 준비없이 갑자기 가지말아야 할텐데
어떻게든 미리 준비를 좀 해야 할텐데...


막상 뭘 준비하려니 딱히 할 게 없다.
변변치 않은 삶인가 싶어
오히려 한심하다...

갈대

 

                    신용선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사랑인 것을


그대를 잊기 위하여
살갗에 풀물이 밴 야영의 생애를
이끌고
바닥에 푸른 물이 고인 아득히 오래된
마을,
그대의 귀엣말보다 더 낮은 소리의 세상으로
내려가기도 했었네.


제 울음 다 울고 다른 울음 바라보는
아무 그리움도 더는 없는
키 큰 갈대가 되어
귀 기울여 바람소리 아득히 들리는
먼 강변에
홀로
서 있기도 했었네.

.......................................


억새

                          신용선


간결해지기 위해
뼈에 가깝도록 몸을 말리는
억새처럼


저절로 알아먹었던 유년의
말 몇 마디만 남기고
다 버리고 싶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의
갈기가 되어
달리다가 일어나고


달빛이 들면 있지도 않은 이별을 지어
손을 흔드는
억새처럼


속없이 살고 싶습니다.
눈물로도 와해되지 않는
세상의 일들 잊고

.........................................................................

말과 소리, 글과 눈, 가슴과 눈물, 그리고 바람...

스러져 누울 때까지 홀로 서 있어야 한다는 인간의 숙명을

그 누구인들 벗어날 수 있을까마는

가벼이 보내려 애 씀을 '삶'이라 할 밖에...

생전에 단 한번 마주치지 못한,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간 그의 발자취를,

그의 흥얼거림을 고스란히 뒤따라 가며 듣고 있다.

이 가을... 저 강변 어딘가에서, 저 산모퉁이를 돌면

다시 그의 노래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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