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내 인생


                               정끝별

 


속 싶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

내가 가진 것, 가질 수 있는 것, 가지고 싶은 것을 모두 꺼내본다.
참으로 변변히 잴 것도 없는 품새에
펼쳐보기도 부끄러워 얼른 걷어치운다.


10년을 키운 화초들은 제법 그럴 듯한 모양새를 갖춘 것들도 좀 있다 싶은데,
조심스럽게 거울을 보고, 예전 사진을 보니 나는 10년동안 늙기만 했다.


한바탕 푸념을 늘어놓고 나니,
자작나무 같은 시인은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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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고 지나가는 2

 

                                                                                                                      정끝별


미끌하며 내 다섯 살 키를 삼켰던 빨래 툼벙의 틱, 톡, 텍, 톡, 방망이 소리가 오늘 아침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와 수챗구멍으로 지나간다 그 소리에 세수를 하고 쌀을 씻고 국을 끓여 먹은 후 틱, 톡, 텍, 톡, 쌀집과 보신원과 여관과 산부인과를 지나 르망과 아반테와 앰뷸런스와 견인차를 지나 화장터 길과 무악재와 서대문 로터리를 지나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지나간다 꾹 다문 입술 밖에서 서성이던 네 입술의 뭉클함도 삼일 밤 삼일 낮을 자지도 먹지도 못하던 배반의 고통도 끝장내고 말거야 내뱉던 악살의 순간도 지나간다 너의 첫 태동처럼 틱, 톡, 텍, 톡, 내 심장 한가운데를 지나 목덜미를 지나 손끝을 지나간다 지나가니 여전히 누군가를 만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웃고 울고 입을 맞추고 쌀을 사고 종이와 볼펜을 사고 모자를 사고 집을 산다 한밤중이면 더욱 크게 들려오는 틱, 톡, 텍, 톡, 소리를 잊기 위해 잠을 자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틱, 톡, 텍, 톡, 날카로운 구두 뒤축으로 나를 밟고 지나가는 그 소리보다 더 크게 틱, 톡, 텍, 톡, 기침을 하고 틱, 톡, 텍, 톡, 노래를 하고 틱, 톡, 텍, 톡, 싸운다 틱, 톡, 텍, 톡, 소리가 들리는 한 틱, 톡, 텍, 톡, 나는, 지나가는 것이고 틱, 톡, 텍, 톡, 살아 있는 것이다 틱, 톡, 텍, 톡, 틱, 톡, 텍, 톡, 틱, 톡, 텍, 톡……


밀 물

                        정끝별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벌거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

 

신세대 시인의 대표주자 격인 정끝별의 시 입니다.
그런데 그이도 40대 중반이 훌쩍 넘었다는 걸, 오늘 새삼 알고는 깜짝 놀랍니다.
제스스로 주워먹은 나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겁니다...
그녀의 글은 소탈하고 담백하면서도 어딘가 서늘하고 스산합니다.
한겨울 벌거벗고 신경줄까지 드러낸채 길가에선 서릿한 자작나무처럼 말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항상 어딘가 기댈 곳이 있음을, 항상 지켜보아주는 그 무엇이 있음을 믿고 있는 듯 보이는군요.
그것이 남편이든, 아이들이든, 돈이든, 명예이든, 혹은 그냥 희망이나 믿음이든 아무 상관없겠지요. 그냥 다행인 것을요...^^...
사람 사는 삶이 무에 그리 다르겠습니까. 무사하니 다행인 것이지요...
바다가 잠잠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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