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가고
나희덕
가야지 어서 가야지
나의 누추함이
그대의 누추함이 되기 전에
담벼락 아래 까맣게 영그는
분꽃의 씨앗, 떨어져 구르기 전에
꽃받침이 시들기 전에
무엇을 더 보탤 것도 없이
어두워가는 그림자 끌고
어디 흙 속에나 숨어야지
참 길게 울었던 매미처럼
둥치 아래 허물 벗어두고
빈 마음으로 가야지
그때엔 흙에서 흙냄새 나겠지
나도 다시 예뻐지겠지
몇 겁의 세월이 흘러
그대 지나갈 과수원길에
털복숭아 한 개
그대 내 솜털에 눈부셔하겠지
손등이 자꾸만 따갑고 가려워져서
나를 그대는 알아보겠지
.................................................
계절이 지나간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간다.
시간이 지나간다.
일분, 이분, 한시간, 두시간, 하루, 이틀, 일년, 십년...
어제가 가고, 오늘이 또 간다.
겨울이 지나가고 나면
봄이 오겠지.
오늘이 지나면
내일 오겠지.
그렇게 무심히 지나가는 것조차
자취를 남기는 법
비록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삶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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