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편지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오후 내내 눈이 내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장면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똑같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공간을 가득 메운
하얀 눈가루 눈가루...


눈은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공간 가득 뿌려져 있는 듯 했다.
이러다 눈 앞이 모두 하얗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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