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이재무


늦도록 내 눈을 다녀간 시집들 꺼내놓고 다시 읽는다
한때 내 온몸의 가지에 붉은 꽃 피우던 문장들
책 속 빠져나와 여전히 흐느끼고 있지만 울음은
그저 울음일 뿐 더 이상 마음이 동요하지 못한다
마음에 때 낀 탓이리라 돌아보면 걸어온 길
그 언제 하루라도 평안한 날 있었던가
막막하고 팍팍한 세월 돌주먹으로 벽을 치며
시대를 울던, 그 광기의 연대는 꿈같이 가고
나 어느새 적막의 마흔을 살고 있다
적을 미워하는 동안 부드럽던 내 마음의 순은
잘라지고 뭉개지고 이제는 적보다도 내가 나를
경계하여야 한다 나도 그 누구처럼
적을 닮아버린 것이다 돌멩이를 쥘 수가 없다
과녁이 되어버린 나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고 아파트를 장만하는 동안
뿌리 잃은 가지처럼 물기 없는 나날의 무료
내 몸은 사랑 앞에서조차 설렘보다는
섹스 쪽으로 기울고 있다 질 좋은 밥도
마음의 허기 끄지 못한다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늦도록
잘못 살아온, 지울 수 없는 과거를 운다

...............................................................................

무엇 하나 올곧게 똑부러지게 하는 일이 없다.
언제나 두루뭉술...
언제 그런 적이 있었는지 자신에게 반문해보니
역시 어정쩡한 대답이 돌아온 듯 만듯 되돌아온다.
늦은 밤,
시인의 회한이 한줄 한줄
고스란히 내 맘에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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