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김지하


지나가는 걸 붙들 순 없다
별이 뜨길래
밤하늘 쳐다보고
서편으로 달이 지길래
서편을 노을마다 뛰는 가슴으로
미리 향했던 때가 지나간다

 
때론 국밥집
때론 앉은뱅이 악사를 찾아
공연히 장터 헤매는 요즈음
외마디 기인
비명이 나를 뺏던 그때마저
지나간다 지나간다

 
조금 낮은 가을바람에도
가죽장갑을 끼는 요즈음
나 없이
내가 나를 생각던 때는
훨씬 지나 저기 달아난다

 
속으로 묻건대
무엇이 또 남아
언제 나를 또 지나갈까

 
지나가는 걸
스스로 지나칠 일만 남았다.
........................................

시가
내 일상이 되고
힘이 되었다.

 

아직 읽지 못한
천 편의 시가 남았다.

 

내게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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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맞서 민주화 투쟁의 표상이었던 시인 김지하의 대표시입니다.

우리 역시 한 시절, 목에 핏대를 세우며 가슴이 터져라 불렀던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재벌, 언론, 정치세력들이 함께 여론을 몰아가던 그 시절의 아픔이 고스란히 기억속에 되살아 납니다.

 

오늘은 문득 이 시를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최근 잇달은 촛불시위 현장에서의 공권력 투입, 끝내는 끔찍한 희생을 불러 온 용산 참사,
그리고 오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쌍용자동차 공장에서의 진압작전 등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제각기 다른 사안이어서 이유는 차지하고서라도 계속되는 무리한 공권력에 의한 참상을 지켜보는 것은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참으로 안타깝고, 자꾸만 분노하게 만듭니다.


과연 저들에게 국민은 무엇이며, 저들이 지켜야 하는 국민은 누구인가요?

지금도 모 포털사이트 대부분의 메인뉴스는 미국 여기자 석방과 잡다한 연예계 소식으로 도배되어 있군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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