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나무의 농사


                              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뜨리고 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되 무게의 그늘이다
..............................................................

무엇이든 어디 한 번에 다 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한 발 한 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보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겠지...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그걸 꽃이 핀 걸 보고서야 알았는데...


그런가 싶으면 또
온 등짝이 시릴만큼
날이 춥다.


오늘도 그런 날이어서
봄이 오긴 왔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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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제(聖誕祭)


                                   김종길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흐르는 까닭일까.

.....................................................................

벌겋게 달구어진 숯불보다 뜨거운,

핏빛 산수유 열매보다 붉은

젊은 날의 내 아버지의 손길이

이 겨울 밤, 열로 상기한 내 볼에 닿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습니다.

아, 아버지!

가슴 한 복판이 뜨겁게 시려옵니다.

 

한 때는 부정하고만 싶었던

내 혈관속에 흐르는 그의 피를 가슴으로 느끼며

다시 뜨겁게 눈물이 흐릅니다.

아, 아버지, 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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