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15 - 겨울 사랑의 편지 -


                                    김용택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을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보면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달빛 산빛을 머금으며
서리 낀 풀잎들을 스치며
강물에 이르면
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
가만가만 어는
살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
땅을 향한 겨울풀들의
몸 다 뉘인 이 그리움
당신,
아, 맑은 피로 어는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


섬진강 시인 김용택 님의 시입니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다 그런 것은 아니지요.

풀잎의 맑은 피를 느끼는,


잔물결의 아픔을,
땅을 향한 그리움을 아는
그의 마음은 따뜻하겠지요...

 

따뜻한 가슴...
맑은 피...
우리가 언제나 그리워하는 것들 중 하나일테지요...

  들국화

                        김용택


나는 물기만 조금 있으면 된답니다

아니, 물기가 없어도 조금은 견딜 수 있지요

때때로 내 몸에 이슬이 맺히고

아침 안개라도 내 몸을 지나가면 됩니다

기다리면 하늘에서

아, 하늘에서 비가 오기도 한답니다

강가에 바람이 불고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별이 지며

나는 자란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찬 바람이 불면

당신이 먼데서 날 보러 오고 있다는

그 기다림으로

나는 높은 언덕에 서서 하얗게 피어납니다

당신은 내게

나는 당신에게

단 한번 피는 꽃입니다

.........................................

 
  들 국         

 

                           김용택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오는데 뭔 헛짓이다요

저런 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헌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 턴디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 헌다요 뭔 소용이다요....

...........................................................

섬진강 시인 김용택 님의 가을 노래가,

들국화의 노래 두 편이 너무나 극적이다.


가을의 절대고독을, 그 고단한 갈망을

가을 한녘의 기다림을, 그 막막한 설렘을

몸과 마음으로 갈무리해내는 방식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누군가가 그리우면 아니, 그냥 그 무엇이 그리우면

너무나 몹시 그리워 가슴이 부서질 듯 시리면

나는 과연 둘 중 어떤 모양새로 감당하고 있는지...

아니 나는 도대체 어느 한 구석 시리기나 한 건지...


그래도 가을이 무척 많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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