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 옛길


                        김선우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火酒―


싸아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컹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화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

....................................................................

두 볼이 날카로운 그 무엇으로 긁어내듯 따갑고 쓰라리다.
숨을 들이마시기가 무섭게 콧 속을 지나 목줄을 타고
서리발이 쫙 서는 느낌...


순간, 목줄이 어는 듯 아프고 목이 탄다.
뒷머리를 무엇인가가 콱 찌르고,
뜨끔하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인다.


칠흑같은 어둠과 찬 공기 무겁게 내려앉은 새벽,
그보다 더 무거워진 발길을 옮기며
칼날같은 세찬 바람을 가르고,
영영 끝날 것 같지않은 아득한 시간을 제껴가며,
눈길을 터벅터벅 걸어 

산을 오른다.


시간은 흐르고,
길도 지나가고,
새벽을 지나 아침이 밝아오고,
언젠가는 산마루에 오른다.


다시 내려가야 하는 길,
죽어도 못 오를 것 같았던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또 내려 간다.
다시는 못 오를 것 같던 길을 따라
이제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런데...
지금, 가고 싶다.

거꾸로 가는 생

 

                                      김선우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나이 서른에 나는 이미 너무 늙었고 혹은 그렇게 느끼고
나이 마흔의 누이는 가을 낙엽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어도
갈래머리 여고생처럼 후르륵 가슴을 쓸어 내리고
예순 넘은 엄마는 병들어 누웠어도
춘삼월만 오면 꽃 질라 아까워라
꽃구경 가자 꽃구경 가자 일곱 살배기 아이처럼 졸라대고
여든에 죽은 할머니는 기저귀 차고
아들 등에 업혀 침 흘리며 잠 들곤 했네 말 배우는 아기처럼
배냇니도 없이 옹알이를 하였네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머리를 거꾸로 처박으며 아기들은 자꾸 태어나고
골목길 걷다 우연히 넘본 키작은 담장 안에선
머리가 하얀 부부가 소꿉을 놀 듯
이렇게 고운 동백을 마당에 심었으니 저 영감 평생 여색이 분분하


구기자 덩굴 만지작거리며 영감님 흠흠, 웃기만 하고
애증이랄지 하는 것도 다 걷혀
마치 이즈음이 그러기로 했다는 듯
붉은 동백 기진하여 땅으로 곤두박질 칠 때
그들도 즐거이 그러하리라는 듯


즐거워라 거꾸로 가는 생은
예기치 않게 거꾸로 흐르는 스위치백 철로
객차와 객차 사이에서 느닷없이 눈물이 터저 나오는
강릉 가는 기차가 미끄러지며 고갯마루를 한순간 밀어 올리네
세상의 아름다운 빛들은 거꾸로 떨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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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의 밤


                          김선우

 

생리통의 밤이면
지글지글 방바닥에 살 붙이고 싶더라
침대에서 내려와 가까이 더,
소라냄새 나는 베개에 코박고 있노라면


푸른 연어처럼...


나는 어린 생것이 되어
무릎 모으고 어깨 곱송그려
앞가슴으론 말랑말랑한 거북알 하나쯤
더 안을 만하게 둥글어져
파도의 젖을 빨다가 내 젖을 물리다가
포구에 떠오르는 해를 보았으면
이제 막 생겨난 흰 엉덩이를 까불며
물장구를 쳤으면 모래성을 쌓았으면 싶더라


미열이야 시시로 즐길 만하게 되었다고
큰소리 쳐놓고도 마음이 도질 때면
비릿해진 살이 먼저 포구로 간다


석가도 레닌도 고흐의 감자먹는 아낙들도
아픈 날은 이렇게 혁명도 잠시
낫도 붓도 잠시 놓고 온종일 방바닥과 놀다 가려니
처녀 하나 뜨거워져 파도와 여물게 살 좀 섞어도
흉 되지 않으려니 싶어지더라
.................................................................

 

난 그녀의 시가 좋다.


살짝 살짝 드러내는 속살의 투명한 빛깔도 그렇고,

감각적이다 못해 다소 자극적인 표현들도 거침없이 뱉어내는 말투도 그렇고.

아득한 시간 너머의 부옇게 바랜 기억들을 머리채 잡듯 홱 잡아채서 끄집어내는 말솜씨도 그렇다.

그리고 어디엔가 아프고 지친 마음 달래주는 따스한 말 한마디를 숨겨두는 재치 또한 그렇다. 

 

그녀의 말은 차갑고, 예리하며, 감각적이고, 둔탁하며, 신랄하고, 노골적이며, 솔직하고, 담백하다.

그래서 매력적이며,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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