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신경림  
 


생전에 아름다운 꽃을 많이도 피운 나무가 있다.
해마다 가지가 휠 만큼 탐스런 열매를 맺은 나무도 있고,
평생 번들거리는 잎새들로 몸단장만 한 나무도 있다.
가시로 서슬을 세워 끝내 아무한테도 곁을 주지 않은 나무도 있지만,
모두들 산비알에 똑같이 서서
햇살과 바람에 하얗게 바래가고 있다.
지나간 모든 날들을 스스로 장미빛 노을로 덧칠하면서.
제각기 무슨 흔적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다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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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한 점, 비 한방울 없어 보이는 푸른 하늘엔 햇볕 가릴 구름조차 드물다.
무엇이든 다 태워버릴 기세로 따갑도록 내리쬐는 여름 한낮 볕에
큰 화분이 넘치도록 자란 과꽃이며 백일홍 꽃이 하얗게 타버렸다.


맥 없이 축축 처진 화초들이 안스러워 서둘러 물을 대주려니
언제 맺힌지도 모를 땀방울이 먼저 짧은 구랫나루 타고 뚝뚝 떨어지고
금세 소낙비라도 맞은양 등판이 전부 흥건히 젖었다.


오늘은 가지마다 잔뜩 매달린 붉은 만냥금 열매를 다 따주고 시든 잎이며 가지도 다 정리해줘야겠다.
먹지도 못할 농익은 열매들 매달고 있기도 만만치 않을 테고,
메마른 잎이며 마른 가지도 어지간히 귀찮을 테고,
늦 봄에 꽃 떨어져 이제 갓 맺힌 어린 초록 열매들도 잘 키워야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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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날


                       신경림


새벽 안개에 떠밀려 봄바람에 취해서
갈 곳도 없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불현듯 내리니 이곳은 소읍, 짙은 복사꽃 내음.
언제 한 번 살았던 곳일까,
눈에 익은 골목, 소음들도 낯설지 않고.
무엇이었을까,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이.
낯익은 얼굴들은 내가 불러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복사꽃 내음 짙은 이곳은 소읍,
먼 나라에서 온 외톨이가 되어
거리를 휘청대다가
봄 햇살에 취해서 새싹 향기에 들떠서
다시 버스에 올라. 잊어버리고,
내가 무엇을 찾아 헤맸는가를.
쥐어보면 빈 손, 잊어버리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서 내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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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봄바람 났으면 좋겠더라.

올 봄에도 봄 꽃 구경도 변변히 못하고
세월만 그저 보냈다.


이제 봄 비 궂게 내릴테고

심술맞은 봄바람마저 닥치면
꽃잎은 다 떨어지고,
내 맘도 어디론가 흩어져
갈팡질팡 하다가
아른아른 멀어지고...

어른어른 늙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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