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제(聖誕祭)


                                   김종길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흐르는 까닭일까.

.....................................................................

벌겋게 달구어진 숯불보다 뜨거운,

핏빛 산수유 열매보다 붉은

젊은 날의 내 아버지의 손길이

이 겨울 밤, 열로 상기한 내 볼에 닿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습니다.

아, 아버지!

가슴 한 복판이 뜨겁게 시려옵니다.

 

한 때는 부정하고만 싶었던

내 혈관속에 흐르는 그의 피를 가슴으로 느끼며

다시 뜨겁게 눈물이 흐릅니다.

아, 아버지, 내 아버지!

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

술병이 잔에다 술을 따르며 비어가듯,

원죄에 얽힌 인연으로 

어른은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문득, 비바람이 세차게 불던 어느 봄 날,

마루 끝에 쪼그려 앉아 흐느끼는 아버지의 소리를 듣습니다.

 

어느 순간,

비우던 소주잔에서 인생의 쓴내가 물씬 풍길 때,

아버지,

당신의 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한 생의 무게가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후두두둑...

빗소리 들이치는 홑겹 양철 지붕 아래에

깊은 밤 잠 못 이룬 채

세 아이를 줄줄이 눕혀 놓고

소주 한 병을 한 잔 한 잔 따라 비우며 

부스럭대던 그 소리가

 

지금.

꽃 비 날리는 저 창 밖 어딘가에서

허공을 맴돌아 자꾸만

자꾸만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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