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눈깨비

 

                        강은교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부서지며 맴돌며
휘휘 돌아 허공에
자취도 없이 내리네
내 이제껏 뛰어다닌 길들이
서성대는 마음이란 마음들이
올라가도 올라가도
천국은 없어
몸살치는 혼령들이


안개 속에서 안개가 흩날리네
어둠 앞에서 어둠이 흩날리네
그 어둠 허공에서
떠도는 허공에서
떠도는 피 한 점 떠도는 살 한 점
주워 던지는 여기
한 떠남이 또 한 떠남을
흐느끼는 여기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그대여
어두운 세상 천지
하루는 진눈깨비로 부서져 내리다가
잠시 잠시 한숨 내뿜는 풀꽃인 그대여.

.....................................................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어쩌면 우리 생이 그렇지....


어두운 세상 천지를 떠돌고 또 떠돌고
언젠가는 앉을 자리에 앉아
그동안의 이런 저런 얘기라도
속 시원히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멀리 아주 멀리 가고 나서야

허공에 대고 이런 저런 얘기 주워담는구나.
어제는 이맘때 눈이 펑펑 내렸는데
오늘은 안개가 자욱하고 날이 훤하다.

 

'명시 감상 1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후명...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0) 2009.03.12
김남조... 설일(雪日)  (0) 2009.03.09
이상... 거울  (0) 2009.02.19
맹문재...사십세  (0) 2009.02.19
이정록...서시  (0) 2009.02.1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