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불빛

                                   김진경

 

산 아래 펼쳐진 불빛 자욱하다
언젠가
저 불 켜진 골목 어딘가에
너와 함께 서있었다
낮은 처마 밑으로 새나오는 불빛
오래 바라보며
간절하게
그 작은 불빛 하나 이루고 싶었다
그 때 첫 키스를 나누었던가
기억이 멀어 생각나지 않는데
그 오래 남은 간절함으로 따뜻한
세상의 불빛

 


빈 집 
                                  김진경

 

무너진 토담 한 귀퉁이, 햇빛이 빈 뜨락을 엿보는 사이 작고 흰 꽃을 흔들며 개망초떼가 온 집안을 점령한다.

썩은 지붕 한구석이 무너진 외양간, 비쳐드는 손바닥만한 햇빛 속에도 개망초는 송아지처럼 순한 눈을 뜨고 있다.

개망초떼들이 방심한 채 입 벌린 빈집을 상여처럼 떠메고 일어선다.

하얗게 개망초꽃 핀 묵정밭 쪽이 소란하다.
혹시 집 앞길로 사람들이 흘러가다가, 잠시 멈추어 내리기라도 한다면,

개망초들은 시치미를 떼고 서서, 햇빛 속에 흔들리리라.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빈집은 숲에 묻히겠지.
문득 개망초꽃 하나가 내 어깨에 햇빛의 따뜻한 손을 얹으려 한다.

나는 완곡히 이 위안을 사양한다.

내가 지금 귀기울이는 건 다른 소리이다.

사람의 기운이 이제 아주 떠나려는 듯 사랑방에서 두런두런거리기도 하고, 쇠죽 끓이는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외양간에 쇠방울이 딸랑거리기도 하고, 누군가 쟁기며 삽날이 흙과 사람과 개망초꽃더미 사이에 내쉬고 들이쉬던 숨결을 가만히 어루만져 거두어들인다.

언뜻 구름의 그림자가 빈 뜨락을 스치고, 그의 헛기침 소릴 들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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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 꽃 그득 핀 빈집 뜰안을
담밖에서 바라보고 돌아서는 한 사내의 뒷모습
그 자리에 남은 개망초 꽃의 위안을
완곡히 사양하는 그의 어깨짓


멀어지고, 지워지고, 잊혀지고, 사라지고 나면
거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지나쳐 가면 멀어지고,
눈 앞에서 지워지고,
그렇게 잊혀지고,
어느 순간 사라진다.

 
애틋함과 간절함과
아쉬움과 그리움
모두...


구름의 그림자가 빈 뜰을 스치듯
바람이 옷깃을 스쳐 지나가듯
잠시
그 자리에 머물다 사라질 것이다.


짧은 첫 키스의 짜릿한 추억으로
오늘 밤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가녀린 촛불 하나를 밝힐까?
 

그렇게 깨끗이 비워내고, 흔들리다
흔들리다 잠이 들고
잠이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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