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남한산성에 오른다.

추운 날씨인데다 제법 이른 시간이건만, 입구부터 사람들로 북적인다. 저마다 배낭 하나씩 걸머 매고 등산 지팡이를 든 사람도 적지 않다. 마치 산악회 시산제 (始山際)에 몰려든 사람들 같다. 두터운 외투와 등산바지에 등산화 장갑까지 갖춘 사람들은 저 눈 덮인 골짜기를 굴러도 거뜬할 것이다.

그에 비해 내 옷차림새가 너무 허술하다.

사람들이 내뿜은 허연 입김과, 골짜기에 내려앉은 새벽안개와, 군데군데 피어오르는 낙엽 태우는 연기와, 재떨이 앞에 오골거리며 모인 사람들이 피워대는 담배연기로 주위가 온통 부옇다.

'남한산의 푸른 정기 담뿍이 안고, 새 일꾼 기다리던 복 받은 땅에,

  내일 위해 형제들이 땀을 흘리니 천년만년 이어나갈 생활의 터전...'

'성남 시민의 노래' 가 나무에 엉성하게 매달린 볼성사나운 공용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진다.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도 귀담아 듣는 이가 없다.

노래 가락이 참 허허롭다.


 

 

작가 김 훈의 '남한산성은 시작부터가 이처럼 허허롭다.

페이지를 열어보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이 책의 결말을 잘 알고 있다.

삼전도 여진의 군영 앞에서 청의 칸에게 조선의 국왕이 땅바닥에 이마를 찧어가며 치욕의 삼배를 올리는, 우리나라 역사상 유래가 없는 굴욕의 마지막 장면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책 ‘남한산성’ 은 한마디로 허허로우며 무참하다.


여진의 장수 용골대가 이끄는 여진의 군사가 청천강을 건넜다는 소식에 닥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허약한 조정이 그렇고, 그 난리에 닥쳐서도 옳으니 그르니 공허한 논의만을 늘어놓는 당상하관들이 그렇고, 남한산성을 향하는 길 송파나루에서 만난 사공의 입막음을 위해 환도를 꺼내 목을 베고 돌아서는 예조판서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소위 관리들의 힘의 미약함도 그렇고, 추위에 얼어 빠지는 군병들의 손발을 돼지기름에 적신 헝겁 몇 조각으로 겨우 싸매어 보살피는 이시백의 손길이 그러하다.

 

대장장이 서날쇠에게 종사의 생사를 걸 왕의 격문을 들려 보내며 예조판서가 천비(賤卑)와 맞절하여 배웅하는 장면도 그렇고, 청의 군사들에게 끌려가던 여인네들의 등에서 떼어진 아기들이 꽁꽁 언 강 위에 던져져 줄줄이 박혀있는 장면을 전하는 애꾸눈 땅꾼의 이야기도 그렇고, 양지쪽에 모여앉아 이를 털어내며 콩찌기로 연명하는 신세한탄과 더불어 차라리 하루빨리 출성(出城)하기만을 바라는 미천한 군병들의 저질스런 대화도 그렇고, 출성을 반대하며 행궁마당에 포복하고 눈물로 고변하다 야음을 틈타 개구멍으로 도망쳐버리는 관리들의 비겁함도 그렇다.

끝내는 칸의 황색 일산 앞에 무릎 꿇고 이마를 땅에 찧으며 세자와 함께 삼배하는 조선왕의 치욕스런 모습도 그러하다.


작가 김 훈은 이러한 허허로움과 무참함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담담하고 무심하게 그려낸다.

마치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인 것처럼, 그냥 멀리서 바라보는 구경꾼인 냥.


한 나라의 운명이 군데군데 구멍이 숭숭 뚫리고 물에 퉁퉁 불어 곧 허물어져 내릴 성벽과도 같은, 홍이포 포구 앞에 무방비로 벌어진 계집의 가랑이 같은, 살아서 산 것이 아니고 죽어서도 죽은 것이 아닌 이 비참하고 치욕스런 상황을,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그리고 치열하게 적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칸에게 보낼 국서를 올리라는 명을 받고는 줄줄이 맞아서 죽거나 미쳐나간 조선의 중신들처럼 말이다.

나도 무심하게 마지막 장을 다 읽고 허허로움을 덮는다.


어느새 문루가 우뚝 선 남문 앞에까지 올랐다. 산성 벽을 타고 내려 부는 겨울바람이 매섭게 내 눈두덩을 할퀴어 다시 성루를 올려다보지 못하였다. 

내 머리와 등에서 모락모락 김이 오른다. 주변사람들에게서도 그러하다.

어떤 이는 물병을 꺼내들고 물을 마시고, 길 건너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포즈를 취해가며 사진을 찍고, 어떤 이는 담배를 꺼내 물고는 목에 두른 수건으로 식은 땀을 훔쳐내고, 옆에 선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시시덕거리며 수다를 떠는 등 저마다의 볼일로 어수선하다.

그렇게 남문성벽 앞이 분주해졌다.


'남한산의 푸른 정기 담뿍이 안고, 새 일꾼 기다리던 복 받은 땅에,

  내일 위해 형제들이 땀을 흘리니 천년만년 이어나갈 생활의 터전...'

혼자서 ‘성남 시민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다시 성벽을 치닫던 매서운 바람이 어깨를 할퀴고 지난다. 뒷덜미가 저릿하게 시리다.

저 먼 발치의 산성 골짜기 숲 자락이 엉성하여 허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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