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내게로 왔다


                               오인태


한 번도 시를 쓴 일이 없다
시가 내게 왔다 늘
세상의 말은 실없다
하여 다 놓아 버리고 토씨 하나
마저 죽여, 마침내
말의 무덤 같이 허망한 적요
위에 파르르 떤 달
빛 같이 내려서
시인의 몸 안에 들어와서
젖어 오는 것이다.
거부할 수없이
시가 내게로 왔다
.........................................

언젠가부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말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주 가끔은 외로웠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떠올리기도 했고,
통하는 이들과 함께 모여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밖엔 겨울 칼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소리,
그 어떤 말도 전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
모두가 깨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
희미한 한 줄 빛줄기가
무겁게 내린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침묵의 장막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아주 고요한 텅 빈 공간을
눈송이가 펄펄 날고 있다.
하얀 눈송이를 향해

내가

나의 말이

가만히 손을 뻗는다.


눈송이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눈꽃이 되고
음표가 된다
내 손바닥에 내려 앉아
나의 말이 되고
나의 노래가 된다.


펄펄 날아올라
온 세상을 하얗게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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