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를 쏘았다 (랩소디 인 블루)
강영은
건반 위를 튀는 손가락이 싱싱한 총알을 쏟아낸다
몸에 와 박히는 무수한 음의 총알들
납 탄 같은 랩소디 인 블루의 탄피가 귀를 파고든다
음파를 타고 이동해온 슬픔의 멜로디는
정직한 총알이다
기억의 상류를 향해 나아가던 나보다 기억이 먼저
사살된 걸까 돌아오지 않는 기억들
잿빛의 탄흔 자국 무성한 음결 속에서
시퍼런 물줄기 쏟아내는 음계의 하류로 망명한다
(누구에게나 망명하고 싶은 순간이 있는 법이다)
마지막 남은 한 발의 총알이 여운을 남기고 사라지자
붉은 선혈을 뿜는 실내등이 켜지고 커튼콜이 끝난
무대 위에서 어둠이 점점 자라나 도시를 삼킨다
도시는 거대한 무덤이 되어 총탄에 맞은
사람들을 수거해간다
누가 이 절망의 도시를 살아나게 할까
청중석 구석에 자리한 이미 죽은 나에게 낮은음자리인
누군가가 조용히 속삭인다
지구 저편은 환한 대낮, 사막의 전장에서 수신되어오는
짧은 신호음처럼 누군가를 저격하고 있을지도 모를
은빛의 빛나는 총알, 사랑 혹은 문명을 복제하고 있을
그 지나간 음표들이
나를 쏜다, 쏘았다 탕
......................................................
시퍼렇게 날을 세워라
튀어오르는 핏줄을 갈라라
남은 피를 말끔히 나눠 마시리라.
살 한 덩이 써억 베어라
한 세상 참았던 시름을 마음껏 씹어보리라.
이 생의 마지막 날을 위한 성찬,
이제 남겨진 번뇌의 꼬리를 잘라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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