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를 듣다

                     김주대


꽃 지는 고요를
다 모으면
한평생이 잠길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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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더라?

우연히 마주쳤던 나팔꽃

큰 교회 예배당 철조망 아래 터를 잡고
철조망을 따라 눈에 띌 때마다 한 뼘씩 타고 오르더니
어느새 소담하고 넉넉한 꽃송이를 피워냈다.
그 모양새가 하도 대견하여 카메라에 찍어두었다.


지난 몇 날 계속된 폭염은
길고 긴 장마끝의 눅눅함을 모두 말려버릴 듯 기세가 대단했다.
문득 나팔꽃의 안부를 물으러 아침 일찍 서둘러 예배당 담벼락 산책을 나섰다.
안타깝게도 철조망을 타고 오르던 나팔꽃은
모두 누렇게 타서 바싹 말라 붙어있었다.


나팔꽃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이것도 운명이었을까?
하필 거기에 뿌리를 내려 햇볕 가릴 곳 없는 뙤약볕 아래
달궈질대로 달궈진 철조망에 매달려 바싹 말라 타죽어야 했을까?


다리 뻗을 자리 보고 뻗으라 당부하던 어르신 말이 그렇게 듣기 싫더니만
누렇게 타서 말라 붙어버린 나팔꽃이
그래서 뿌리내릴 곳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우리네 삶에 있어 선택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자취만 겨우 남은 것이

귓전에 대고 나발을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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