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女子)


                      송수권


이런 여자라면 딱 한 번만 살았으면 좋겠다
잘하는 일 하나 없는 계산도 할 줄 모르는 여자
허나, 세상을 보고 세상에 보태는 마음은
누구보다 넉넉한 여자
어디선가 숨어 내 시집 속의 책갈피를 모조리 베끼고
찔레꽃 천지인 봄 숲과 미치도록 단풍 드는
가을과 내 시를 좋아한다고
내가 모르는 세상 밖에서 떠들고 다니는 여자
그러면서도 부끄러워 자기 시집 하나 보내지 못한 여자
어느 날 이 세상 큰 슬픔이 찾아와 내가 필요하다면
대책없이 떠날 여자, 여자라고 말하면
'여자'란 작품 속에만 숨어 있는 여자
이르쿠츠크와 타슈켄트를 그리워하는
정말, 그 거리 모퉁이를 걸어가며 햄버거를 씹는
전신주에 걸린 봄 구름을 멍청히 쳐다보고 서 있는
이런 여자라면 딱 한 번만 살았으면 좋겠다
팔십리 해안 절벽 변산 진달래가
산벼랑마다 드러눕는 봄날 오후에
...................................................................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해맑은 웃음으로
채 털어내지 못한 이른 잠을 깨우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싱그런 아침 바람의 얘기를 전하고
따뜻한 손길로
간밤 나눴던 사랑의 온기를 전하고
새하얀 허벅지를 베 주는 여자


밤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내리며
잘 잤느냐고 귓전을 간질이며 속삭여주는,
새하얀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아주 편안하게 잤다고 웅얼거리는 말 한마디를
행여 흘릴까 귀 기울여 듣고
잔잔한 미소로 답하는 여자


이 순간이,
기적같은 일상의 매 순간이
모두 감사임을 안다고...
그 소중함을 간직하고 산다고...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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