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일


                        신용선


헛딛지 않고도 돌아오는 길이 찾아지는
두 번째 이별처럼
자신이 무언가에 익숙해지고 있음을 깨닫는 일은
쓸쓸하다.


익숙해지는 것은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는 데
드는 시간이
나이를 먹을수록 짧아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쓸쓸하다.
언제나 그 골목의 끝에 서 있으므로 밤이 와도 다만
어둠을 밀어낼 뿐 빛나지 않는 가로등처럼
생기없는 것들, 더 많이 죽음의 편에 서 있는 것들이
익숙하게 자신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

우리가 가고 오는 길이 다르지 않아
오면, 만나게 되고
또 가면, 잊게 되는 것...


어디만큼 왔는지라도 알면
속이 편해질지,
아니면 갑갑해질지...


그래도 준비없이 갑자기 가지말아야 할텐데
어떻게든 미리 준비를 좀 해야 할텐데...


막상 뭘 준비하려니 딱히 할 게 없다.
변변치 않은 삶인가 싶어
오히려 한심하다...


           Aleksandr Sergeevich Pushkin (1799-1837)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또 다시 그리움이 되리라

....................................................................

얼마나 저렇게 심장만 뛰고 있게 될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든 게 불안하고 두렵다.
이제 좀 잘 살려나 기대했었는데...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혹한 현실.
어느날 무심코 떠나는 자,

이유없이 남겨진 자에게 모두...


어쨌든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모르기에
얼굴이라도 한 번 봐야겠다.


이별이 잦아졌다.
이제 곧 이별을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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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씻으며


                            김종목

 
발을 씻으며
문득 발의 고마움을 생각한다.
꽉 닫힌 구두 속에서
하루종일 견뎌낸 고마움을 생각한다.
얼굴이나 손처럼
밝은 곳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고
좋은 것도 만져보고,
그러나 발은 다섯 개의 발가락을 새끼처럼 껴안고
구두의 퀘퀘한 어둠 속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외진 곳에서
흑진주 같은 까만 땀을 흘리며
머리와 팔과 가슴과 배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하는구나.
별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발아
저녁마다 퇴근하여 씻기도 귀찮아했던 발아
너의 고마움이 왜 뒤늦게 절실해지는 걸까.
오늘은 발가락 하나하나를
애정으로 씻으면서
수고했다. 오늘도 고물차같은 이 몸을 운반하기 위하여
정말 수고했다.
나는 손으로 말했다.
손으로 다정하게 말했다.
...................................................................................

'수고했다...'

오늘도 입으로 말하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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喪家에 모인 구두들


                                      유홍준 
 

저녁 상가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들이 구두들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망자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상가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식구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북천(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몇 개
.......................................................................................

날이 풀리면서 유난히 어른들의 영면소식이 잦다.
지난 달, 이달만해도 벌써 여러차례 문상을 다녀왔다.

 
땅이 녹을 때 쯤이면, 땅의 기운이 변하는 환절기면,
어김없이 잦아지는 이별의 통보들...
참 희안하다.


할머니도 편안히 눈 감으신지 이제 일년이 됐다.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던 당신의 아들 곁으로
가신지 벌써 한 해가 훌쩍 지났다.
아직 우리가 살고 있는 자리는 어수선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잘 계시리라.


내일 모레 정성으로 준비한 상을 차리고,
향불을 피워 먼 북천에서도 잘 계시도록 축원드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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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애타게 기다리는 일
무엇보다 가슴 애리는 일...


하지만...
가슴 두근거리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었는지를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안다...


너를 기다리던 그 시간이 몹시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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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그리움


                             김재진


찻잔을 싸안듯 그리움도
따뜻한 그리움이라면 좋겠네
생각하면 촉촉이 가슴 적셔오는
눈물이라도 그렇게 따뜻한 눈물이라면 좋겠네
내가 너에게 기대고 또 네가
나에게 기대는
풍경이라도 그렇게 흐뭇한 풍경이라면 좋겠네
성에 낀 세상이 바깥에 매달리고
조그만 입김 불어 창문을 닦는
그리움이라도 모락모락
김 오르는 그리움이라면 좋겠네

.......................................................................

한 순간 한 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 한 달이 모여 일년이 되고...


하나 하나가 서있으나 서로 기대선 한 무리가 되고
무리져 있으나 실은 각각이 하나이네.


지나간 순간은 의미없지 않으나
지금의 나에겐 중요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이 얼마일지는 모르나
그것만이 내겐 의미가 있다네.


행여 여지껏 마음에 둔 일이 있거든
곁을 지나가는 시간과 함께 떠나 보내소.
그리고 영영 잊으소.


우리가 하늘이 불러 어쩔 수 없이 서로를
먼 길 보내기 전 까지는
영영 잊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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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사


                      이생진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커가며 부처를 닮았다
숱한 이파리를 훌훌 벗어 버리고
가을엔 해탈 지경
그러나 초봄엔
다시 살겠다고
몸부림칠 것같다


오전 열 시의 겨울 햇살은
모두 도선사 뜰 안으로 모이고
대웅전 부처가 빙그레 웃으면
촛불이 그것을 수긍하는 몸짓을 한다
참회도장 앞뜰에
장독이 이 백 스물 하나
모두 뚜껑을 쓴 부처 같다
하지만 그곳에 합장하는 이 없다
.............................................................................................

 

 

삶의 길이 곧 도(道)의 길이라서
그 길이 결코 다르지 않다.
도(道)가 곧 길이니 더욱 더 그러하다.


믿음의 근본도 다르지 않을텐데,
생각해 보니 나도 장독대에 합장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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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장호에서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 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

 

 

한 겨울 꽁꽁 얼어붙은 호수...
하지만 그냥 건너다니다간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란다.


얼어붙은 호수도 숨을 쉬어야 한단다.
그래서 숨구멍이 있단다.


강추위에 어깨 움츠리고...
그보다 더 차갑고 매서운 세상살이에 고개숙이고...


숨구멍이 찾아야 할텐데...
한숨이라도 뱉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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