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읽는 여인


                            손희락

 
별빛 레일 달리는 전철 안
피곤에 지친 눈빛들 사이
시집을 읽고 있는
여인의 미소를 밟고 섰다


화장기 없어
화려하지 않은
단정한 여인에게서
야릇한 향기 진동한 까닭인지


책장 넘기는 하얀 손 잡아끌어
전철 역 근처 커피숍에 앉아
밤새워 이야기꽃 피우고 싶은
시인의 바람 끼가 요동친다


나는 왜 시집을 읽고 있는 눈빛을 만나면
그 앞에 가만히 멈춰 서게 되는 것일까
첫 만남, 이름모를 여인이지만
오랜 친구인 듯 정이 간다 

....................................................................................................

간혹, 지하철에서 어떤 이가 내가 읽었던 책을 들고 열중해있는 걸 보면
자꾸 얘기해주고 싶고, 간섭하고 싶어진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없지만...


가끔, 이 하늘아래에는 같은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좀 남아있음을 알게 되고,
그들과 스치게 된다는 것은 참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 혼자만 알게되는 흐뭇함이긴 하지만...

가슴을 열고 하늘을 보면


                                       추은희


꽃이 피고 지면서

생명의 뿌리와 뿌리가

깊게 더 깊게

진하게 더 진하게

목숨을 열고

가슴을 여는

그 진실을 이제는 알 것 같다

............................................................

매서운 한겨울 추위로 어깨 잔뜩 움츠리고
미끄러운 길을 정신 바짝차리고 걸어야 한다
한 발 한 발이 조심스럽기만하다.


하루 하루 그렇게 지나다 보니
일년이 훌쩍 지났음을 이제야 안다.


내가 이제껏 무얼하고 살았나 후회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렇게 하루 하루 무사히 살고 있음의 의미를

,
변함없이 제자리 지켜낸 내 의지를,
그 용기를,
그 힘을


어깨 한 번 쫙 펴고,
가슴 활짝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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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오는 산사(山寺)에서


                                                     김종목 
 

개울물 소리도 멎은 밤, 눈 오는 소리는 산란(山蘭) 피는 소리 보다 곱다.
이따금 순백(純白)의 선율로 내리는 눈이 법당 앞 댓돌 위로 소복소복 쌓이고,
스산히 씻기는 바람소리는 귀를 더욱 맑게 한다.
극락전을 돌아 동백 터지는 소리가 맑게 들리고 심중(心中)에
구겨 넣은 번뇌가 저절로 터져 한 장의 백지로 홀러내린다.
 가벼워진 마음에도 눈이 내린다.

그지없이 평온한 반야(般若)경이 빛나고 가슴 속 하나의 길이 뚫리는 지금,
내가 가 닿아야 할 견성의 불꽃은 손가락 끝마다 숯불처럼 뜨겁다.
오욕(五慾)이 후둑후둑 떨어져간 저 산 아래로 내가 버린 발자국 소리가 하얗게 빛나고,
깊이 잠 든 중생의 꿈이 서역(西域)을 돌아 저마다 부처님의 얼굴로 내려온다.
 곱게 단 동정 끝에 떠오르는 미소는 마음 속을 스쳐 어디로 가는가.

놋주전자에서 밤새 설설 끓는 솔잎차는 그대로 공양으로 올라가고,

이따금 떨어지는 적막은 정일품(正一品)이다.

뜰 아래로 내려 와 한 모금 축이는 입술에 스르르 감전(感電)되는 오도(悟道).
아 이 순간, 마음에 남은 한 장의 백지마저 날아가버리고 빈 공간으로 차오르는 법열(法悅)의 눈만이 하염없이, 하염없이 내리는구나.
......................................................................

 

 

눈이 많이 온다는 예보(豫報)다.
서울에 눈이 온다는 것은 가끔은 좋지 않은 뉴스거리라서,
설레기 보다는 긴장되는 분위기다.


날이 추워지는 것도 그렇고, 길이 막혀서도 그렇고,
온통 미끄럽고 지저분해져서 사고도 많아지니 그렇고,
회사며 학교엘 가야하는데, 여러가지로 성가셔지는 것 때문에도 그렇고...


눈이 온다는 것은 내게는 아직
바람결에 묻어오는 쌀랑하고 선듯한 느낌이 그냥 좋기도 하고,
어릴적 신나게 눈길을 헤치며 뛰놀던 기억이 아련히 떠올라 미소짓게도 하고,
이젠 이름도 희미한 누군가의 소식이 들려올 것 같은 설레임이 남아있고......


언 나뭇가지 쌓인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는 소리
먼 데서 따악- 따악-
들려 올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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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다


                             천양희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벼르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세상은 그래도 살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그리워진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랑은 그래도 할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절망은 희망으로 이긴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슬픔은 그래도 힘이 된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가치 있는 것만이 무게가 있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소한 것들이 그래도 세상을 바꾼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소리 더 잘 들으려고 눈을 감는다
이로써 내 일생은 좋았다고

...........................................................................................

 

 

2009년의 마지막 달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새벽녘에 문득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생각에 쫓겨 잠이 깼다.
매운 겨울 바람에 차가울 대로 차가워진 바깥 풍경을 내려다 본다.


그래,

언제나 나를 키우는 것은 바람...
언제나 나를 깨우는 것은 눈물...
언제나 나를 세워주는 것은 마주잡은 너의 따뜻한 손...

언제나 지나간 시간은 아름다운 것
그렇게 믿고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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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海風)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


허무의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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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지나간 시간은 모두 아름다웠노라'고 누군가가 말했단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결코 아름다웠을리 없는 시간들...
견디어 내는 것조차 힘겨워,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고 지나온 세월...


그래, 어쨌든 늘 그랬듯이 오늘도 나는 하루를 그럭저럭 살아내고 있고,
언제 그랬냐는 듯, 지나간 시간은 흐릿한 기억으로만 시들어
지금 내 삶에 그리 무게를 더해줄 것 같지는 않다.


이제와서 흘러간 시간에 대해 달리 할 말은 없다.
잘 살아줘서 고맙다고.
앞으로도 잘 지내보자고...
혼자서 제 어깨랑, 제 등짝을 다독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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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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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물이 흐르고, 세월도 흐르고,
달이 뜨고, 다시 어두워져 돌아가고...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
저 강물이 그렇고, 저 슬픔이 그렇고
우리 생이 그렇고...


우리가 저와 같아서...
우리가 저와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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