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쓰는 일

 

                        이생진


시보다 더 곱게 써야 하는 편지
시계바늘이 자정을 넘어서면서
네 살에 파고드는 글
정말 한 사람만 위한 글
귀뚜라미처럼 혼자 울다 펜을 놓는 글
받는 사람도 그렇게 혼자 읽다 날이 새는 글
그것 때문에 시는 덩달아 씌어진다
.....................................................................

언젠가부터 내 안에는
작은 새가 한마리 산다.


언제나 나보다 먼저
새벽을 맞아
내 의식을 깨우고
밤을 기다려
모두가 잠든 후에야
비로소 쉬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너를 맞아
눈 뜨게 하고
너를 만나
비로소 숨쉬게 하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신의 소리를 듣고
모든 깨어있는 감각으로
내게 전달하여
허락하신 하루에

제 스스로 감사 기도 올리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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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사


                      이생진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커가며 부처를 닮았다
숱한 이파리를 훌훌 벗어 버리고
가을엔 해탈 지경
그러나 초봄엔
다시 살겠다고
몸부림칠 것같다


오전 열 시의 겨울 햇살은
모두 도선사 뜰 안으로 모이고
대웅전 부처가 빙그레 웃으면
촛불이 그것을 수긍하는 몸짓을 한다
참회도장 앞뜰에
장독이 이 백 스물 하나
모두 뚜껑을 쓴 부처 같다
하지만 그곳에 합장하는 이 없다
.............................................................................................

 

 

삶의 길이 곧 도(道)의 길이라서
그 길이 결코 다르지 않다.
도(道)가 곧 길이니 더욱 더 그러하다.


믿음의 근본도 다르지 않을텐데,
생각해 보니 나도 장독대에 합장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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