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와도 젖은 자는


                              오규원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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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얻기 위해 떠난 여행이 있었던가?
나그네 가는 길.


무엇을 얻으려 되돌아간다 한들 그것이 얻어지는가?
이미 지나 온 길.


자연은 신을 비추는 거울,
스스로 그러한 것에 무엇을 더 더하려 하는가?


삶의 시선 그리고 영혼의 향기...
언젠간 자연스럽게 되길 바라본다.
나도 당신도...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끄만 女子,
그 한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나는 정말로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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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마라, 울지 마라...
네 눈물 마를 때 까지 흘려도 좋으련
하지만 이제는 더 울지 마라.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라...
너 저무는 날까지 지켜준다 약속하련
행여 내가 먼저 이 세상 떠나더라도
그 약속은 반드시 지키려니
아프지 마라, 더 아프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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