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친 새벽 산에서
 

                            황지우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창(槍) 꽂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希望)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내딛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가열찬 산행...

그리움도, 외로움도 생각할새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너에 대한 모든 기억을 산길에 줄줄이 흘려버리고 돌아왔다.

다시는 산을 오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새벽 산의 기운을 호흡했던 것이 언제였던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오늘 문득, 다시 새벽 산을 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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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애타게 기다리는 일
무엇보다 가슴 애리는 일...


하지만...
가슴 두근거리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었는지를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안다...


너를 기다리던 그 시간이 몹시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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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농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의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은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
이 사랑을 어떻게 우리의 얄팍한 입으로 더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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