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반 이상 넘겼건만 난 아직도 촐라체를 오르지 못하고 있다.

 박상민과 하영교는 왜 그 죽음의 산에 무방비로 자신을 내어 맡기려하는지, 도피도 도전도 아닌

그저 대책없이 오르려고만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 삶의 근원적인 질문인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와 맞닿아 있어 이유를 해답을 찾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 질문에 막혀 오르지도 내려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 소설은 해발 6440미터 히말라야 촐라체의 등반기나 정복기가 아니라, 6박 7일간의 삶과 죽음의

칼날 같은 경계를 넘나들다 손가락 발가락을 묻어두고 간신히 살아 돌아오는 젊은 등반가의 생환기이다.

왜 그들은 그래야만 했을까?

우리 생에 있어 삶과 죽음의 간극이 얼마나 좁은가?

엊그제 만난 이의 부고를 들을 때의 서늘함이나, 지난주에 전화 통화하던 친구의 사망소식을 전해들을 때의

당혹감은 어쩌면 그 가까운 거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크레바스와 암벽을 만나게 되는지 생각해 보면, 저들이 겪은 7일간의

치열한 생사의 고비들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들에게도 역시, 그 치열한 자신들의 삶의 짧은 한 순간의 갈림길 정도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 질문에 대한 정리를 해보니, 그제서야 나도 천천히 촐라체의 빙벽을

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닥쳐오는 삶의 시련과 고통,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마다,

깨어나는 삶에 대한 치열한 욕망과 가녀린 희망, 결코 놓을 수 없는 그 진실하고 간절한 삶의 끈을,

삶의  진정성을 찾아 나서고 있었다.

박범신의 소설 ‘촐라체’ 의 두 주인공 박상민과 하영교는 그렇게 다시 살아 돌아왔다.

수없이 닥쳐오는 죽음의 고비를 넘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견디고, 삶의 실낱같은 불씨를 살려내고,

결코 놓칠 수 없었던 삶의 끈을 붙들고...

드디어 나도 촐라체를 넘었다.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켠이 서늘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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