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송수권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하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鐘(종)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
아주 오래 전 다 지나버린 아픔을 얘기하는데
푸른 물감이 번지듯 가슴에 슬픔이 가득 번진다.
아무 것도 남아있을 게 이젠 없을텐데 했는데
눈에 띄지 않는 곳 어딘가에 응어리가 남았나 보다.
이야기가 넉넉히 익어갈 무렵,
누구나 다 한가지씩 가슴에
아픔을, 슬픔을 묻고 산다고
위안 아닌 위안을 삼고 일어서는데
한 쪽 다리가 저려온다.
그럼 저리지나 말아야지
그럼 아프지나 말아야지......
'명시 감상 5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교... 소리 (0) | 2013.07.01 |
---|---|
고영민... 꽃다발 (0) | 2013.06.28 |
김광규... 나 (0) | 2013.06.18 |
박철... 여자의 일생 (0) | 2013.06.17 |
송수권... 내 사랑은 (0) | 2013.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