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의자

                       김기택


묵묵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늦은 저녁, 의자는 내게 늙은 잔등을 내민다.
나는 곤한 다리와 무거운 엉덩이를
털썩, 그 위에 주저앉힌다.
의자의 관절마다 나직한 비명이
삐걱거리며 새어나온다.
가는 다리에 근육과 심줄이 돋고
의자는 간신히 평온해진다.
여러 번 넘어졌지만
한 번도 누워본 적이 없는 의자여,
어쩌다 넘어지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허공에 다리를 쳐들고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는 의자여,
걸을 줄도 모르면서 너는
고집스럽게 네 발로 서고 싶어하는구나.
달릴 줄도 모르면서 너는
주인을 태우고 싶어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네 위에 앉는 것이 불안하다.
내 엉덩이 밑에서 떨고 있는 너의 등뼈가
몹시 힘겹게 느껴진다.
........................................................................

시간이 흐르면 변해가는 것.
스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언제까지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을까?


우리 더 자라지 못한 지 이미 오래,
혹시 더 깊어지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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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


                                                 김기택


창문이 모두 아파트로 되어 있는 전철을 타고
오늘도 상계동을 지나간다.
이것은 32평, 저것은 24평, 저것은 48평,
일하지 않는 시간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또 창문에 있는 아파트 크기나 재본다


전철을 타고 가는 사이
내 어릴 적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어떤 모습이었을까? 무엇을 하며 놀았을까?
나를 어른으로 만든 건 시간이 아니라 망각이다.
아직 이 세상에 한 번도 오지 않은 미래처럼
나는 내 어린 시절을 상상해야 한다.
지금의 내 얼굴과 행동과 습관을 보고
내 어린 모습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러나 저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어릴 적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하듯이
기억은 끝내 내 어린 시절을 보여주지 못한다.
지독한 망각은 내게 이렇게 귀띔해준다.
너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 얼굴이었을 거라고.


전철이 지하로 들어가자
아파트로 된 창문들이 일제히 깜깜해지더니
또 다른 아파트 창문 같은 얼굴들이 대신 나타난다.
내 얼굴도 어김없이 그 사이에 끼여 있다.
어릴 적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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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친구들과 마주 앉았다.
이런저런 얘기들로 어느새 시간이 휙 지나갔고
헤어질 준비를 슬슬 할 때가 됐다.


내 어릴적 모습도 생각나지 않는다.
무척 귀엽게 생겼었다고 하는데...


그리고 보니
다른 녀석들의 어릴적 모습이 전혀 생각나질 않는다.
분명 많이 변하지 않은 친구들도 있는데...


생각만 그랬던게지,
누가 봐도 40대 아저씨 아줌마들인걸...


어쩌다 한 번쯤은
지금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스스로 그려보고
잘 새겨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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