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화


                                  김용택


나는 물기만 조금 있음면 된답니다
아니, 물기가 없어도 조금은 견딜 수 있지요
때때로 내 몸에 이슬이 맺히고
아침 안개라도 내 몸을 지나가면 됩니다
기다리면 하늘에서
아, 하늘에서 비가 오기도 한답니다
강가에 바람이 불고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별이 지며
나는 자란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찬 바람이 불면
당신이 먼데서 날 보러 오고 있다는
그 기다림으로
나는 높은 언덕에 서서 하얗게 피어납니다
당신은 내게
나는 당신에게
단 한번 피는 꽃입니다


 

 들국            


                       김용택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오는데 뭔 헛짓이다요
저런 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헌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 턴디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 헌다요 뭔 소용이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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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1    
  
                   김용택


바람이 붑니다
가는 빗줄기들이 옥색 실처럼 날려오고
나무들이 춤을 춥니다


그대에게
갈까요 말까요
내 맘은 절반이지만
날아 온 가랑비에
내 손은 젖고
내 맘도 벌써 다 젖었답니다


봄비 2    
  
                  김용택


어제는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고운 봄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막 돋아나는 풀잎 끝에 가 닿는 빗방울들,
풀잎들은 하루종일 쉬지 않고 가만가만
파랗게 자라고


나는 당신의 살결같이 고운 빗줄기 곁을
조용조용 지나다녔습니다


이 세상에 맺힌 것들이 다 풀어지고
이 세상에 메마른 것들이 다 젖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내 마음이 환한 하루였습니다. 어제는 정말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운 당신이 하얀 맨발로
하루종일 지구 위를
가만가만 돌아다니고


내 마음에도 하루 종일
풀잎들이 소리도 없이 자랐답니다. 정말이지


어제는
옥색 실같이 가는 봄비가 하루 종일 가만가만 내린
아름다운 봄날이었습니다.
...............................................

화려하고 현란한 봄 꽃의 향연이 막을 내릴 즈음,
이젠 그 열기를 식히려는 듯
가만가만 종일토록 봄비가 내립니다.


빗방울이 지글지글 우산에 듣는 소리를 들으며
문득 어디선가 아름다운 사랑노래가 흘러나올 것 같아
주위를 두리번 거립니다.


다시 우산 아래의
지글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의 지난 시간들에 대한 생각에 젖어봅니다.


이미
우산도
길도 다 젖었습니다.


내 옷소매도
바짓가랑이도 다 젖었습니다.


혹시
내 마음이 젖을까봐
얼른 옷깃을 여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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