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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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집 - 겨울 판화(版畵) 1

                                                                 기형도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우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 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 가득 풀풀 수십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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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

                                 기형도


아이는 살았을 때 한 가지 꿈이 있었다.
아무도 그 꿈을 몰랐다.


죽을 때 그는 뜬 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별이 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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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그리 넉넉치 않은 집 방안,
겨울 외풍에 코끝이 시리고
이불 밖으로 삐죽이 나온 발끝이 시리고
머리맡에 놓인 요강의 오줌도 얼고,
널어놓은 내복 빨래 소매단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던 때가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안개처럼 겨울비가 내리는 날이면
진눈깨비 흩뿌리는 날이면


요절한 시인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그가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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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불빛

                                   김진경

 

산 아래 펼쳐진 불빛 자욱하다
언젠가
저 불 켜진 골목 어딘가에
너와 함께 서있었다
낮은 처마 밑으로 새나오는 불빛
오래 바라보며
간절하게
그 작은 불빛 하나 이루고 싶었다
그 때 첫 키스를 나누었던가
기억이 멀어 생각나지 않는데
그 오래 남은 간절함으로 따뜻한
세상의 불빛

 


빈 집 
                                  김진경

 

무너진 토담 한 귀퉁이, 햇빛이 빈 뜨락을 엿보는 사이 작고 흰 꽃을 흔들며 개망초떼가 온 집안을 점령한다.

썩은 지붕 한구석이 무너진 외양간, 비쳐드는 손바닥만한 햇빛 속에도 개망초는 송아지처럼 순한 눈을 뜨고 있다.

개망초떼들이 방심한 채 입 벌린 빈집을 상여처럼 떠메고 일어선다.

하얗게 개망초꽃 핀 묵정밭 쪽이 소란하다.
혹시 집 앞길로 사람들이 흘러가다가, 잠시 멈추어 내리기라도 한다면,

개망초들은 시치미를 떼고 서서, 햇빛 속에 흔들리리라.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빈집은 숲에 묻히겠지.
문득 개망초꽃 하나가 내 어깨에 햇빛의 따뜻한 손을 얹으려 한다.

나는 완곡히 이 위안을 사양한다.

내가 지금 귀기울이는 건 다른 소리이다.

사람의 기운이 이제 아주 떠나려는 듯 사랑방에서 두런두런거리기도 하고, 쇠죽 끓이는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외양간에 쇠방울이 딸랑거리기도 하고, 누군가 쟁기며 삽날이 흙과 사람과 개망초꽃더미 사이에 내쉬고 들이쉬던 숨결을 가만히 어루만져 거두어들인다.

언뜻 구름의 그림자가 빈 뜨락을 스치고, 그의 헛기침 소릴 들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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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 꽃 그득 핀 빈집 뜰안을
담밖에서 바라보고 돌아서는 한 사내의 뒷모습
그 자리에 남은 개망초 꽃의 위안을
완곡히 사양하는 그의 어깨짓


멀어지고, 지워지고, 잊혀지고, 사라지고 나면
거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지나쳐 가면 멀어지고,
눈 앞에서 지워지고,
그렇게 잊혀지고,
어느 순간 사라진다.

 
애틋함과 간절함과
아쉬움과 그리움
모두...


구름의 그림자가 빈 뜰을 스치듯
바람이 옷깃을 스쳐 지나가듯
잠시
그 자리에 머물다 사라질 것이다.


짧은 첫 키스의 짜릿한 추억으로
오늘 밤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가녀린 촛불 하나를 밝힐까?
 

그렇게 깨끗이 비워내고, 흔들리다
흔들리다 잠이 들고
잠이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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