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신경림  
 


생전에 아름다운 꽃을 많이도 피운 나무가 있다.
해마다 가지가 휠 만큼 탐스런 열매를 맺은 나무도 있고,
평생 번들거리는 잎새들로 몸단장만 한 나무도 있다.
가시로 서슬을 세워 끝내 아무한테도 곁을 주지 않은 나무도 있지만,
모두들 산비알에 똑같이 서서
햇살과 바람에 하얗게 바래가고 있다.
지나간 모든 날들을 스스로 장미빛 노을로 덧칠하면서.
제각기 무슨 흔적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다하면서.
...........................................................................................................


바람 한 점, 비 한방울 없어 보이는 푸른 하늘엔 햇볕 가릴 구름조차 드물다.
무엇이든 다 태워버릴 기세로 따갑도록 내리쬐는 여름 한낮 볕에
큰 화분이 넘치도록 자란 과꽃이며 백일홍 꽃이 하얗게 타버렸다.


맥 없이 축축 처진 화초들이 안스러워 서둘러 물을 대주려니
언제 맺힌지도 모를 땀방울이 먼저 짧은 구랫나루 타고 뚝뚝 떨어지고
금세 소낙비라도 맞은양 등판이 전부 흥건히 젖었다.


오늘은 가지마다 잔뜩 매달린 붉은 만냥금 열매를 다 따주고 시든 잎이며 가지도 다 정리해줘야겠다.
먹지도 못할 농익은 열매들 매달고 있기도 만만치 않을 테고,
메마른 잎이며 마른 가지도 어지간히 귀찮을 테고,
늦 봄에 꽃 떨어져 이제 갓 맺힌 어린 초록 열매들도 잘 키워야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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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신경림


배낭 하나 메고
협궤철도 간이역에 내리다
물이 썰어 바다는 먼데도
몸에 엉키는 갯비린내
비늘이며 내장으로 질척이는 수산시장
손님 뜸한 목로 찾아 앉으니
처녀적 점령군 따라 집 떠났다는
황해도 아줌마는 갈수록 한만 늘어
대낮부터 사연이 길다
갈매기가 울고
뱃고동이 울고
긴 장화로 다리를 감은
뱃사람들은 때도 시도 없이 술이 취해
유행가 가락으로 울고
배낭 다시 들쳐메고 차에 오르면
폭 좁은 기차는 마차처럼 기우뚱대고
차창으로 개펄이 긴
서해바다 가을이 내다보인다
......................................................................

아직 휴가지를 정하지 못했다.
바다를 갈까, 산으로 갈까.
아이들과 집사람까지 모두 네식구가 떠나야하는 여행준비는
언제나 복잡하고 번거롭다.


문득 아무 때나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던
젊은 날을 추억해 본다.

그래, 이번엔 아무 곳이나
발길 닿는대로 가봐야겠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은
실행되기도 어렵겠지만

우리 가족 그 누구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봄 날


                       신경림


새벽 안개에 떠밀려 봄바람에 취해서
갈 곳도 없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불현듯 내리니 이곳은 소읍, 짙은 복사꽃 내음.
언제 한 번 살았던 곳일까,
눈에 익은 골목, 소음들도 낯설지 않고.
무엇이었을까,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이.
낯익은 얼굴들은 내가 불러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복사꽃 내음 짙은 이곳은 소읍,
먼 나라에서 온 외톨이가 되어
거리를 휘청대다가
봄 햇살에 취해서 새싹 향기에 들떠서
다시 버스에 올라. 잊어버리고,
내가 무엇을 찾아 헤맸는가를.
쥐어보면 빈 손, 잊어버리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서 내릴지도.
........................................................................

제발 봄바람 났으면 좋겠더라.

올 봄에도 봄 꽃 구경도 변변히 못하고
세월만 그저 보냈다.


이제 봄 비 궂게 내릴테고

심술맞은 봄바람마저 닥치면
꽃잎은 다 떨어지고,
내 맘도 어디론가 흩어져
갈팡질팡 하다가
아른아른 멀어지고...

어른어른 늙어지고...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어제도 무척이나 속이 상해
이것 저것 별의 별 생각 다 하다가
늦은 밤까지 소주 한 잔으로 속을 달랬다.


사는 게 다 그렇다고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가을이 깊었는지...
저 편 강둑길에 갈대꽃이 하얗게 줄줄이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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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랑의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나목(裸木)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 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사는 게 원수라고,

왜 사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도 있지만,
시원스레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산다는 게 무엇인지는 몇 십년을 곱씹어도
잘 모르겠다고...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건지는 수백번을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더라고...


오늘 저 사람들은 왜 죽었는지도 물어봐야 하는데,
오늘 저 사람들은 왜 죽어야했는지도 물어봐야 하는데,
오늘 저 사람들을 왜 죽여야했는지도 따져 물어봐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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