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집에


                      김광규


복실이가 뒷다리로 일어서서
창틀에 앞발 올려놓고
방 안을 들여다본다
집 안이 조용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나 보다
오후 늦게 마신 커피 덕분에
밀린 글쓰기에 한동안 골몰하다가
무슨 기척이 있어
밖으로 눈을 돌리니
밤하늘에 높이 떠오른
보름달이 창 안을 들여다본다
모두들 떠나가고
나 홀로 집에 남았지만
혼자는 아닌 셈이다
...................................................................

늘 반쪽만 커튼이 드리워진 내 창으로
용케 비친 반달
쌀랑한 기운이 코끝에 살짝 묻어온다
무심코 창을 열어젖히기엔 아직
내 잠도 내 마음도 달갑지않다.


이른 새벽, 뒤척이다 우연히 마주친
반쪽 남은 달이 반쯤만 잠을 깨웠다.


머리맡 어딘가에 던져둔 담뱃갑
마음 한구석에 늘 웅크리고 앉은
유혹의 싹을 손을 뻗어 더듬거려 찾는다.
지금부터 반쯤만 그 유혹을 태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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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선 나무
           

                  유경환


나무 위로 바람 없이
날아 오르는 꽃잎을
아이가 쳐다보고 있다.


뾰죽탑 위로 바람 없이
오르내려 흩어지는 구름 조각 끝
아이가 턱에 걸고 있다.


날아오르는 일이
가장 하고 싶던 갈망이었음을
뉘에게도 말할 사람이 없었던 때


꽃잎보다 구름보다 높게
전봇대만큼 키 크는 꿈을
대낮 빈 마을에서 아이가 꾼다.


그 아이는 지금껏 혼자인
늙지 않으려는 나.
.........................................................


그땐 힘든 줄 모르고
뒷산 가파른 언덕배기를 한달음에 뛰어올랐지.
네 활개를 펴고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서야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달랬지.


한가로운 흰구름 듬성듬성 떠다니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며
콩닥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한 점 부끄럼없이 살 거라 다짐했지.


향긋한 풀내음에 잠깐 눈을 감았고
나른한 풀잠에 푹 빠져버렸지
심술궂은 봄볕에 새까맣게
그을리는 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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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綠陰)


               허영자


오직 이 순간만을
뜨겁게 숨차게
그리고
당당하게
짧더라도 굵게.....


이십대 젊은날의
기고만장하던
그러나
더없이 순수하던
푸른 기염같이


타오르는
녹음(綠陰).

...........................................

타오르는 햇볕이 뜨겁다.
글자 그대로 맹하(猛夏)다.


조금 지나고 나니,
우리의 푸르름이 짧은 한때임을 안다.


그래서 꺾이지 않을 것같은 이 염천(炎天)도
고분고분히 견뎌낼 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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