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이가 있던 자리
이윤훈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티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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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이윤훈' 시인의 시입니다.
가슴 한 켠 시린 구석,
뻥뚫린 구멍이 없는 가슴이 어디 있을까?
누구나 숙명처럼
그 구멍을 틀어막고 숨기고 산다.
구멍이 다시 뚫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 믿고, 다짐도 해 본다.
옹이가 빠져나간 구멍을 통해
아픈 세월을 들여다보는 시린 마음이
내 가슴 어디였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생채기에
또 소금을 뿌린다.
이제는 덜 아프지만,
아니 참을만 하지만
가슴께 어딘가가 시리고 저려오는 곳
아, 또 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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