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 9. 27. 전주. 학살된 시신의 사진만 남아 있고 가해자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구천을 헤매는 그들의 원혼에 묵념을 드린다.
▲ 1950. 9. 27. 전주.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 계실까?
▲ 1950. 9. 29. 충주. 마을 주민들이 학살의 현장을 파서 시신을 확인하고 있다
▲ 1950. 9. 30. 진주. 한 소년이 씨레이션 상자를 조심스럽게 들여다 보고 있다
▲ 1950. 10. 10. 함흥 부근의 한 동굴에서 300여 명의 시신을 꺼내고 있다
▲ 1950. 10. 10. 함흥. 가족을 찾아 헤매면서 울부짖는 아낙네들
▲ 1950. 10. 13. 함흥. 우물에서 학살된 시신을 건져 올리고 있다.
▲ 1950. 10. 19. 함흥. 시신더미에서 가족을 찾고 있다.
▲ 1950. 10. 19. 함흥. 지아비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 1950. 10. 19. 함흥. 학살에는 남녀가 없었다
▲ 1949. 3. 제5차 소련 최고회의에 참석한 김일성(오른쪽 끝)과 박헌영(김일성 바로옆 안경쓴 사람)
▲ 1945. 8. 평양 붉은 광장에서 젊은이들이 스탈린과 김일성을 환호하고 있다.
▲ 1949. 9. 6. 미군사고문단이 국방경비대에서 기관총 훈련을 지도하고 있다.
▲ 1950. 7. 7.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파병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 1950. 8. 미군 포로들이 서울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 1950. 8. 원산, 북한군 선전 벽보.
▲ 1950. 9. 16. 인천상륙 적전 후 텅빈 시가지에서 한 소녀가 울고 있다.
▲ 1950. 11. 21. 압록강변의 혜산진까지 올라간 국군과 유엔군.
▲ 1950. 12. 3. 평양,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넘어 남하하는 피난민 행렬.
▲ 1950. 12. 9. 중공군의 참전으로 혹한 속에 후퇴하는 유엔군.
▲ 1950. 9. 30. 전화(戰禍)로 폐허 가 된 대전역
▲ 1950. 11. 24. 불타버린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 1950. 10. 7. 불타고 있는 김포 비행장
▲ 1950. 10. 18. 전화에 그을린 중앙청
▲ 1950. 10. 18.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멀리 북악산과 중앙청 돔이 보인다.
▲ 1950. 9. 20. 왜관, 낙동강 철교 복구 공사
▲ 1950. 10. 12. 미조리호 군함에서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다
▲ 1950. 10. 20. 400여 명의 낙하산부대가 평양부근에 투하되고 있다
▲ 1950. 12. 18. 북한군에게 뿌린 귀순 권유 전단
▲ 1950. 11. 2. 적십자사에서 피난민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있다
▲ 1950. 10. 13. 경기도 파주, 참혹하게 학살된 시신들
▲ 1950. 11. 1. 서울 중앙청 앞 지금의 문화관광부 자리, 주민들이 폐허더미에서 땔감이나 돈이 될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 1950. 11. 2. 원산의 한 성당, 폐허가 된 성당 내부를 신도들이 청소하고 있다
▲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탈곡한 볏단을 달구지에 싣고 있다
▲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전란 중에도 추수를 하고 있다. 바람개비로 알곡을 가리는 농부들
▲ 1950. 11. 19. 북한의 한 지하 무기 공장 내부
▲ 1950. 11. 20. 국경지대, 미군들이 소달구지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다.
▲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비료공장
▲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송전소
▲ 1950. 11. 23. 함경도 갑산, 미군 폭격으로 성한 집이 드물다
▲ 1950. 11. 1. 황해도 평산에 진격하는 유엔군을 두 여인이 전신주 뒤로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 1950. 12. 4. 평양을 떠나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국군
▲ 1950. 12. 6. 황해도 사리원, 남행하는 피난열차에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 1950. 12. 8. 경기도 금촌, 38선을 넘어 후퇴하는 유엔군 차량들.
▲ 1950. 12. 9. 끊어진 한강철교.
▲ 1950. 12. 10. 포화에 불타는 마을.
▲ 1950. 12. 12. 한강 부교를 통하여 후퇴하는 차량들.
▲ 1950. 12. 12. 피난민들이 한강을 나룻배로 건너고 있다 .
▲ 1950. 12. 12. 유엔군들이 인천항을 통해 장비들을 후송시키고 있다.
▲ 1950. 12. 12. 유엔군들이 후퇴하면서 다리를 폭파시키고자 폭약을 장치하고 있다.
▲ 1950. 12. 3. 평양, 남행 피난민 행렬 속의 한 소녀.
▲ 1950. 12. 10. 중공군의 참전으로 강추위 속에 후퇴 행렬. 한 병사가 너무 추운 날씨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다.
▲ 1950. 12. 12. 흥남부두, LST 함정에 가득 탄 군인과 피난민들. 미처 함정에 오르지 못한 피난민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원자탄이 투하된다는 말에 피난 행렬에 나섰다고 한다. 몇 날의 피난 길이 50년이 더 지났다.
▲ 1950. 12. 14. 서울역, 남행 피난민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 1950. 12. 16. 흥남, 국군과 유엔군들이 후퇴하고자 부두에서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다.
▲ 1950. 12. 27. 흥남, 얕은 수심으로 수송선이 해안에 닿을 수 없자 유엔군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LST로 가고 있다.
▲ 1950. 12. 24. 흥남, 유엔군들이 철수 후 부두를 폭파시키고 있다.
▲ 1950. 12. 19. 묵호, 흥남에서 철수한 장비를 묵호(동해)항에 내리고 있다.
▲ 1950. 12. 28. 서울, 피난민들이 강추위 속에 한강 얼음을 깨트리며 나룻배로 남하하고 있다.
▲ 1951. 1. 5. 피난 행렬 속의 소년과 소녀. 소달구지가 힘겨워하자 힘을 보태고 있다.
▲ 1950. 8. 20. 경북 어느 지역, 아이를 업고 머리에는 가재도구를 이고 있는 여인은 내 고모 아니면 이모일지도. "같이 갑세" "퍼뜩 안 오고 머하노. 쌕쌕이가 벼락친데이. 싸게싸게 따라 오이라."
▲ 1950. 8. 23. 경남 함안, 기차를 타기 위해 늘어선 피난민들. 할아버지 등에는 온갖 가재도구가 짊어져 있고, 오른 손아귀에는 손자가 잡혀 있다.
▲ 1950. 8. 23. 경남 함안, 기차표를 사고자 늘어선 피난민들로 남녀노소없이 피난 봇짐을 이고 지고 있다.
▲ 1950. 8. 23. 경남 함안,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 1950. 8. 24. 경북 낙동강 유역, 꼭 필자의 고향(구미) 마을 같다. 온갖 가재도구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진 피난민 행렬.
▲ 1950. 8. 24. 경북 낙동강 유역, 뙤약볕 속의 피난 길. 어데로 가야 목숨을 부지할지.
▲ 1950. 8. 24. 경북 왜관 부근. "피난 간 새 지발 집이나 무사해야 할 건데..." 뒤돌아 보고 또 돌아보고...
▲ 1950. 8. 24. 경북 낙동강 유역, "할배, 어데 갑니까?" "나 집에 간다." "못 갑니다." "와! 나 죽어도 내 집에서 죽을란다. 어이 비켜라."
▲ 1950. 8. 25. 장소 미상, 기총소사에 쓰러진 피난민들. "이렇게 객사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서 죽을 걸."
▲ 1950. 9. 6. 경북 칠곡 다부동, 가도 가도 끝없는 피난 행렬. 위정자를 잘못 만난 불쌍한 무지렁이 핫바지 백성들이여!
▲ 1950. 10. 11. 서울 교외, 부서진 북한군 전차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 1950. 11. 1. 전란으로 폐허가 된 서울
▲ 1950. 12. 28. 끊어진 한강 철교, 오른쪽은 임시로 만든 부교.
▲ 1951. 1. 3. 한강 철교 부근의 언 강을 피난민들이 걸어서 건너고 있다.
▲ 1951. 3. 16. 서울 중구의 수도극장(현 스카라 극장) 일대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광화문 세종로 일대.
▲ 1951. 3. 16.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왕십리 일대, 멀리 고려대학교 건물이 보인다.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울역 일대
▲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경복궁, 수송동, 팔판동 일대.
▲ 1951. 3. 19. 구호 양곡을 먼저 탄 소년과 양곡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주민들.
▲ 1950. 10. 12. 원산. 학살된 시신들.
▲ 1950. 12. 11. 고단한 피난길.
▲ 1950. 12. 16. 폭격에 엿가락처럼 휘어진 철교.
▲ 1950. 12. 17. 보급품을 실은 화물 열차가 폭격에 불타고 있다.
▲ 1950. 12. 18. 대구.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친 신병들이 전선으로 가고자 대구역전 광장에 집결해 있다.
▲ 1950. 12. 18. 전방으로 떠나는 신병들.
▲ 1950. 12. 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오이라."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돌아올 깁니다."
▲ 1950. 12. 21. 경북 왜관. 낙동강 철교 어귀에 부서진 북한군 소련제 탱크.
▲ 1951. 1. 20. 아버지와 아들의 피난길, 다른 가족은 전란에 모두 죽었다.
▲ 1950. 6. 18. 6.25 한국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덜레스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 1950. 6. 18. 미 국무장관 덜레스 일행이 38 접경 지대를 살피고 있다.
▲ 1950. 7. 한미 수뇌부들이 환담하고 있다(왼쪽부터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 무초 주한 미대사, 임병직 외무장관, 워커 주한 미군 사령관).
▲ 1950. 7. 26. 맥아더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는 중, 종군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워커 장군.
▲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신 국방장관은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라고 상대의 전력도 모른 채 큰 소리쳤으나 6.25 발발 후 서울시민은 팽개치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 1950. 9. 16. 구포 신병 훈련소에서 훈시하는 이승만 대통령.
▲ 1951. 2. 7.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 1951. 2. 15. 대한민국 해상 이동방송선(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
▲ 1951. 9. 콜트 미 8군 부사령관의 이임식장(왼쪽부터 허정, 콜트. 무초 주한 미대사).
▲ 1950. 8. 25. 부산 근교의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심문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 1950. 8. 28. 유엔군에게 잡힌 북한측 포로.
▲ 1950. 10. 영동, 생포한 북한 측 유격대원들
▲ 1950. 11. 15. 영흥, 유엔군들이 생포한 유격대원들
▲ 1951. 1. 16, 부산, 북한 측 여자포로들.
▲ 1951. 2. 26. 포로들이 임시 수용소로 실려와서 내리고 있다.
▲ 1951. 2. 26. 부산, 근교의 임시 포로수용소 전경.
▲ 1950. 3. 9. 유엔군들이 포로들에게 DDT를 살포하고 있다.
▲ 1950. 3. 7. 미군이 중공군 포로의 소지품을 검사하고 있다.
▲ 1951. 5. 10. 미군들이 중공군 포로들에게 DDT를 살포하고 있다.
▲ 1951. 5. 7. 거제포로수용소 전경.
▲ 1951. 5. 29. 화천, 중공군 포로들.
▲ 1951. 5. 29. 13세인 중공군 소년병.
▲ 1951. 6. 26.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이 예배를 보고 있다.
▲ 1953. 7. 27. 유엔군 측에서 송환되는 포로들에게 알리는 지시문.
▲ 1953. 10. 11. 북한측 포로가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히면서 북으로 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