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동화
고미경
파장의 우시장으로 모여드는 아이들
흘린 동전을 찾으려고 소눈깔을 굴린다
진종일 노름판에서 광땡을 잡느라
눈이 더 뻘건 아비
푸른 멍자국 어미가
쇠똥으로 여기저기 널려있는 시장바닥
짤랑짤랑 소리나는 희망 몇 닢을 줍고
땟국 전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쇠똥냄새가 아이들과 숨바꼭질한다
어제는 찌그러진 양은 밥상머리에 코를 박고
한 그릇의 가난을 우적우적 씹고
오늘은 박살난 세간들이 널부러진 대문 앞에서
시커먼 손등으로 눈물 훔치며 소눈깔을 꿈벅거린다
저 놈의 웬수는 귀신도 안 물어가냐는
어미의 시퍼런 악다구니로
가슴 속에서 칼을 키우다가
초등학교 졸업장 받기 무섭게
객지의 공장으로 식당으로 미장원으로 흩어져
누더기진 생을 밤새워 꿰매며
소처럼 울었던 아이들
온양 실옥동 옛거리
시멘트 담벽 곳곳에는 아직도
소울음 메아리진 저녁답이 묻어 있다
..................................................................
어릴 적 가슴팍의 멍자국은
영영 보랏빛으로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
어떻게든 감추려 자꾸만 옷자락을 싸맸다.
지긋지긋한 인고(因苦)의 세월,
아슬아슬한 생사의 고비,
간혹 허망하게 가버린 시간을 돌이켜
잔을 기울이고 한참을 주저앉아 울고 또 울곤 했다.
법당 앞마당 가득 걸린 연등 불을 켜라 명을 받고,
'이 많은 등을 언제 다 켜느냐' 는 우문(愚問)에
'하나 하나 켜면 되지요' 하는 짧막한 대답과 미소.
어느새 경내(境內)를 가득 밝힌 연등 아래
저절로 합장을 하고 마주 선 여승과 나.
'성불하십시요'
하고 돌아서는 소릿결에서
'아, 이제 인고(因苦)의 세월도 끝이 나겠구나.'
탄성이 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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