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말
정 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 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주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무엇이 저리 사무치게 그리울까?
그리움을 안고 사는 것 속절없건만
싹 쓸어버리지 못하고
이제 모양새도 제대로 없는 그것을
또 다시 주섬주섬 주워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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