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김종해
잠을 잘 시간에만 길이 보인다
꿈속에서만 세상을 걸어다녔는데
새벽녘에는 길이 다 지워져 있다
특히 잎 지는 가을밤은 더욱 그러하다
지상의 시간이 만든
벼랑과 벼랑 사이
떨어지는 잎새를 따라가 보면
아, 그 시각에만 환하게
외등이 켜져 있다
.................................................
텅 빈 무대
군데군데 희미한 조명이 하나씩 켜진다.
조명이 밝아지며 등장하는 10살쯤된 남자 아이와 아빠
어두워진다.
스무살쯤의 멋진 청년이 머리를 깎는다
어두워진다.
시위대, 전경, 폭행, 욕설과 화염병, 돌, 쇠파이프
너무나 폭력적인 장면을 담은 슬라이드 필름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어두워진다.
사랑, 기쁨, 희열, 열망, 이별, 슬픔, 아픔, 고통, 외로움, 기다림 수많은 단어들의 느낌이 감각되고
기억조차 희미해진 기억들이
조명이 켜질 때마다 한 장면씩 펼쳐지거나 혹은 겹쳐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언극,
무성영화...
어두워진다
서서히 주위가 밝아진다.
잠을 깼다 아니 연극이 끝났다.
방금 지나간 시간이 아무 의미 없음을 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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