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강영은


오늘처럼 한 남자가 피어나는 건
구름이 제 먼저 와 담장 위에 얹혀 있기 때문이다

 
사랑한 것도 기다린 것도 아닌데,
담쟁이 넝쿨이 자꾸 손을 뻗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한 남자를 적시고 싶은 건
하늘이 제 먼저 와 호수를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한 것도 기다린 것도 아닌데,
그렁한 물빛이 자꾸 깊어지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한 남자 곁에 눕고 싶은 건
햇살이 제 먼저 와 이불을 펴기 때문이다

 
사랑한 것도 기다린 것도 아닌데,
후박나무 너른 등이 자꾸 얇아지기 때문이다

..................................................................

사랑한 것도 기다린 것도 아닌데...

 

계절은 그렇게 찾아오고
다시 지나가고...

 

사랑도 그렇게 다가오고
다시 멀어지고...

 

지금도 가을은 그렇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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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국화

                        김용택


나는 물기만 조금 있으면 된답니다

아니, 물기가 없어도 조금은 견딜 수 있지요

때때로 내 몸에 이슬이 맺히고

아침 안개라도 내 몸을 지나가면 됩니다

기다리면 하늘에서

아, 하늘에서 비가 오기도 한답니다

강가에 바람이 불고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별이 지며

나는 자란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찬 바람이 불면

당신이 먼데서 날 보러 오고 있다는

그 기다림으로

나는 높은 언덕에 서서 하얗게 피어납니다

당신은 내게

나는 당신에게

단 한번 피는 꽃입니다

.........................................

 
  들 국         

 

                           김용택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오는데 뭔 헛짓이다요

저런 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헌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 턴디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 헌다요 뭔 소용이다요....

...........................................................

섬진강 시인 김용택 님의 가을 노래가,

들국화의 노래 두 편이 너무나 극적이다.


가을의 절대고독을, 그 고단한 갈망을

가을 한녘의 기다림을, 그 막막한 설렘을

몸과 마음으로 갈무리해내는 방식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누군가가 그리우면 아니, 그냥 그 무엇이 그리우면

너무나 몹시 그리워 가슴이 부서질 듯 시리면

나는 과연 둘 중 어떤 모양새로 감당하고 있는지...

아니 나는 도대체 어느 한 구석 시리기나 한 건지...


그래도 가을이 무척 많이 깊어졌다.

 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네가 죽고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 네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눈부신 가을 날의 푸르름을 이보다 더
명징하고 멋드러지게 표현할 수 있을까?

 

꽃이 아름다운 것은 영원할 수 없기 때문이요,
우리네 청춘이 아름다운 것도 이 때문이리니

그래, 이 가을 눈물 나도록 그리운 이가 있다면
저 높푸른 하늘 한가운데 뭉게구름 한 덩이로 그려놓고
죽도록 그리워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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