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

 

                         노천명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리를 걸어서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위로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와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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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풍성한 한가위 명절,
꽤 오래 전,
한적한 산골 마을의 추석 풍경이
하늘거리는 한지 한 장에 옮겨지듯
소로시 보얗게 번지며 펼쳐진다.

이십리를 걸어서 장에 나가 추석을 차릴 제수를 준비하는 

정성스런 마음도 전해진다.


아직 덜 저문 하늘에 구름이 한가한 걸 보니,
오늘은 둥그런 달을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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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싶소

초가 지붕엔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에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에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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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이란 짧은 생을 살다갔지만,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을 겪어내며

우리 문단에 깊은 발자취를 남긴 시인이지요.

하지만 친일 행적의 깊이가 워낙 깊어

시인의 문학적인 업적이 가리워집니다...

어찌보면 우리 시대의, 역사의 아픔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사슴' 처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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